‘최고의 악역’ 연기인생 3페이지 이제 시작인데…
2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배우 故 김주혁씨의 발인식이 엄수되고 있다. 최준필 기자
# 다소 예민하고 낯을 가리던 톱스타 시절
1998년 SBS 8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김주혁의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였다.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SBS 드라마 몇 편에 조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2001년 영화 <세이 예스>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하며 영화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YMCA 야구단>을 통해 주연급 조연으로 성장한다.
아무래도 많은 이들이 고인의 대표작으로 기억하고 있는 영화들 역시 그가 한창 영화계에서 주가를 높였던 2003~2006년 사이의 작품들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당시 그는 뜨거운 배우였다. 중견 배우이던 고 김무생의 아들로도 유명했지만 이즈음 이미 그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냈고 2005년 고 김무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선 고 김무생이 김주혁의 아버지로 더 유명해졌을 정도다.
사실 데뷔 초기 김주혁은 ‘심하게 낯을 가리고 다소 예민한 배우’로 알려졌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소 다르다. 당시 김주혁을 인터뷰하거나 촬영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고인에 대한 이미지가 그러했으며 영화관계자들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래도 낯가림뿐 아니라 ‘김무생의 아들’이라는 선입견에 대해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졌던 게 아닌가 싶다. 데뷔 초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저 알고 보면 까불이예요. 막내라 그런지 애교도 많고요”라며 자신을 빈틈이 많은 보통 사람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구탱이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진 요즘의 이미지를 놓고 보면 분명 고인은 ‘까불이’에 ‘애교 많고’ ‘빈틈도 많은’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신인을 거쳐 인기가 급상승하던 터라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내보이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랜 기간 이어진 공개 열애도 고인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고인은 2003년 드라마 <흐르는 강물처럼>을 통해 김지수를 만나 6년 동안 공개 열애를 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열애하는 공개 커플의 경우 지나친 관심과 거기서 비롯된 루머로 힘겨워하곤 한다.
이렇게 2001년 <세이예스>부터 2008년 <아내가 결혼했다>까지가 고 김주혁 필모그래피의 첫 페이지로 기록될 만하다. 어찌 보면 고인의 전성기일 수 있으며 톱스타 시절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만큼 좋은 작품에 연이어 출연했으며 열애설 등으로 사생활까지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 옴 파탈로 시작된 변신, 대중 곁으로 온 ‘구탱이형’
2010년 개봉한 영화 <방자전>을 통해 고인은 스타에서 배우로 본격적인 변신을 했다. 파격적인 노출의 베드신으로 화제가 된 영화지만 옴 파탈로의 완벽한 변신은 이후 그가 보여줄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에 있어 확연한 시작점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의 티켓 파워는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커플즈> <투혼> <적과의 동침> 등 2011년 개봉 영화가 모두 흥행에서 참패했다. 2012년 <무신>과 2013년 <구암 허준> 등 사극 드라마를 통해 연기 폭을 넓혔지만 기대만큼의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 ‘1박2일’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시청자들은 비로소 김주혁이라는 배우의 생생한 모습을 접하게 됐으며 고인은 스타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럼없이 대중의 곁으로 다가갔다.
2010년 <방자전>부터 2015년 ‘1박2일’까지는 고 김주현 필모그래피의 두 번째 페이지로 배우로서의 하락세가 두드러진다. 연기력까지 약화됐다고 볼 순 없지만 흥행력은 다소 아쉬웠다. 톱스타에서 배우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시기를 거치며 고인은 폭발적인 인기가 아닌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를 얻어가게 된다. 사극 드라마를 통해 중장년 측의 사랑을 받았으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세대를 불문한 다양한 대중의 곁에 다가갔기 때문이다.
지난 30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故 김주혁의 발인이 엄수된 2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연인 이유영이 참석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또한 2016년에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출연하며 전세계 영화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여배우 이유영과 사랑에 빠져 공개 열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고 김주혁과 빈소에서 깊은 슬픔에 빠진 이유영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이들의 기억은 그 필모그래피와 대표작들을 통해 정리될 수밖에 없다. 빈소를 찾은 영화관계자들이 더욱 안타까워하는 대목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 열 페이지, 아니 백 페이지 이상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써 내려갈 배우가 세 번째 페이지를 본격적으로 채워가려 하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고인은 보다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점점 깊어지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배우로서 더 묵직한 무언가를 대중에게 꺼내어 보여주려 하는 상황에서 의혹만 가득한 교통사고를 통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고인의 필모그래피는 미완으로 남아 버렸지만 작품들을 통해 고인을 기억하는 팬들의 아쉬움과 애도가 그 빈 공간을 대신 채우게 됐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약물 복용·심장 이상·차량 결함 등 황망한 죽음에 설 난무 고 김주혁은 갑작스러운 죽음만큼이나 큰 의문점을 남기고 떠났다. 사고 조사를 담당한 경찰과 소속사가 직접 나서 “섣부른 의혹 제기를 하지 말 것”을 당부했음에도 계속해서 불거져 나오는 ‘설’들은 그의 죽음이 너무나도 황망함과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발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주혁은 음주를 즐기지 않고 별 다른 지병이 없었다. 김주혁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먼저 제기됐던 의혹은 ‘심근경색’이었다. 당초 사고 당일이었던 지난달 30일 김주혁의 차량이 추돌했던 그랜저 차량 운전자의 진술 때문이다. 운전자는 “1차 추돌 직후 김주혁이 가슴을 움켜잡더니 갑자기 돌진해 다시 차량을 추돌한 뒤, 인근 아파트 벽을 들이받았다”고 진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갑작스런 가슴 통증으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급성 심근경색의 증세이기도 하다. 고 김주혁의 영정사진. 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당일 김주혁의 시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직접 사인은 사고로 인한 즉사 가능 정도의 두부(머리) 손상”이라는 1차 소견을 냈다. 부검결과에 따르면 심근경색의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머리 손상은 김주혁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됐을 뿐, 이날 사고 발생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명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약물 복용 여부, 심장 이상 등 조직 검사가 필수적이다. 복용하던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쇼크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주혁이 최근 병원에서 처방받아 복용한 약품에 졸음 등 부작용이 있어 사고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약물 문제가 있었다면 부검에서 이상이 있다는 소견이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진 또 다른 의혹은 차량 결함이다. 2일 강남경찰서는 사고 당시 김주혁이 몰았던 벤츠 쥐바겐 SUV 차량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넘겨 차량 결함 여부를 확인할 방침을 밝혔다. 사고가 난 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한 그 시간대에 급가속을 내는 차량이 거의 없는 데 반해 김주혁의 경우는 1차 추돌에 이어 동일 차량에 2차 추돌한 뒤 인근 도로의 턱을 넘어 아파트 벽면을 들이 받을 정도로 가속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를 종합하면 사건 당시 김주혁의 차량 제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고 영상에 따르면 김주혁의 차량은 30일 오후 4시 30분께 영동대로 코엑스사거리에서 경기고 사거리 방향으로 편도 7차로 중 2차로를 따라 달리다가 3차로에서 운행 중이던 그랜저 승용차의 운전석 문 부분을 들이받은 뒤 4~5차로에 걸친 상태로 운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랜저 승용차가 사고 수습을 위해 깜박이를 켜고 속도를 줄이자, 갑자기 김주혁의 차량이 급가속하면서 그랜저의 오른쪽 뒷좌석 문을 들이받고 인근 아파트 쪽으로 질주했다. 차량 결함의 가능성이 제기되는 부분이 이 ‘급가속’ 부분이다. 김주혁의 차량은 1차사고 후 4~5차로로 빠지면서 잠시 멈췄다가 갑작스럽게 속도를 높여 그랜저와 2차 접촉 사고를 냈다. 이미 김주혁의 차량 앞뒤로 다른 차량들이 주행 중이었기 때문에 가속 주행은 또 다른 사고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근 아파트 벽면과 출동할 때까지 가속 주행한 것은 운전자의 의사에 따른 게 아니라는 것. 다만 사고 현장에 남은 흔적들은 이 가능성마저 흐리게 하고 있다. 먼저 경찰은 사고 당시 촬영된 영상에서 김주혁의 차량 브레이크 등이 들어오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급발진 등 차량 제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게 되는데, 김주혁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또 사고 현장에서 50m 길이의 스키드 마크(타이어 자국)가 발견됐지만, 이 역시 급발진 시 제동을 걸 때 발생하는 스키드 마크와도 다르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차량 일부가 도로에 끌렸거나 보통 주행 중에 발생하는 스키드 마크에 해당한다는 것이 경찰 측의 설명이다. 이렇듯 급발진 가능성은 적지만 경찰은 차량 결함 유무를 확실히 밝히는 한편, 차량 내부에 남아있을 블랙박스의 확보를 위해 국과수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김주혁의 약물, 조직 검사 등 부검에 대한 최종 결과와 차량 검사 결과를 종합해 수사 방향을 결정할 방침이다. 부검 최종 결과는 1주, 국과수의 차량 검사에는 약 1개월 정도 소요된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