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세게 보석 싹쓸이
2008년 12월 9일 저녁, 명품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파리 몽테뉴 거리의 유명 보석점 ‘해리 윈스턴’에 세 명의 여장 남성들이 들어왔다. 긴 금발머리에 선글라스, 목도리 차림을 한 이들은 갑자기 가방에서 수류탄과 총을 꺼내고 직원들을 위협했다. 이들은 불과 15분 만에 에메랄드와 루비, 다이아몬드가 든 자루 네 개를 챙긴 후 밖에 세워둔 차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해리 윈스턴이 입은 피해액은 약 8000만 유로(약 1400억 원)로 현지 언론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일어난 보석 도난 사건 사상 가장 큰 액수라고 한다. 경찰은 이들이 동유럽 악센트가 강한 불어를 사용한 점과 치밀하면서도 대담한 수법으로 보아 ‘핑크 팬더’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핑크 팬더’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7년 6월 모나코의 보석점을 턴 2인조 강도가 차 사고를 일으켜 경찰에 잡힌 것이 계기가 됐다.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의 수사관이 범행 현장에 남겨진 지문을 유럽 각지의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와 대조한 결과 이들이 전세계를 무대로 보석을 터는 국제적 강도단에 소속된 것을 알아냈다.
이 강도단에 ‘핑크 팬더’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이들이 영화 <핑크 팬더>의 한 장면을 따라했기(?) 때문. 즉, 일당 중 한 명의 애인이 화장품 병에 훔친 다이아몬드 반지를 넣어 빼돌리려다가 붙잡힌 것. ‘핑크 팬더’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인터폴의 주목의 대상이 됐지만 이들의 범행은 계속됐다. 오히려 보석점 점원에게 ‘핑크 팬더’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히고 도주하는 등 경찰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계속해서 대담한 강도 행각을 벌였다.
인터폴의 조사에 따르면 ‘핑크 팬더’는 구 유고슬라비아 및 동유럽의 군인 출신 난민들로 조직된 국제적 강도단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핵심 멤버와 일의 내용에 따라 계약제로 일하는 프리랜서 맴버로 나뉘는데, 그 수가 약 200명에 이른다. 이들은 평소에는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며 병원 청소부 등 일반적인 직업에 종사하다가 ‘큰 건’이 있을 때마다 한 번씩 모인다. 국제적 강도단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여러 명이 보석점에 들어가 진열장을 깨뜨리고 순식간에 보석을 훔쳐 달아나는 단순한 수법을 사용한다. 무기로 사람들을 위협만 할 뿐 큰 부상자나 사망자 등의 인명 피해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이다. 그러나 보석점에서 가장 값나가는 보석만 골라서 순식간에 범행을 끝내는 것으로 볼 때 치밀한 사전조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바이와 스위스, 일본, 프랑스, 모나코 등 온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들의 강도 행각을 보면 웬만한 영화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기발한 부분이 많다.
한번은 지난 2005년 두바이에서 마스크를 한 ‘핑크 팬더’ 멤버들이 고급 차 두 대를 몰고 쇼핑몰의 보석점으로 돌진했다. 이들은 1120만 유로(약 200억 원)어치의 보석을 강탈한 후 보석점을 부수고 들어온 차로 도주했다. 후에 이들이 타고 온 차는 불에 탄 채 발견됐다. 환한 대낮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쇼핑몰에서 일어난 이 강도극은 방범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혀 ‘유튜브’에 올라 20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2007년 런던에서는 운전수가 딸린 고급 벤틀리 리무진을 타고 보석점에 와서는 강도행각을 벌였으며, 프랑스 남부의 비아리츠에서는 보석점 앞의 벤치에 페인트를 칠해 보행자들이 앉지 못하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2년 전에 일어난 보석 강탈 사건이 뒤늦게 ‘핑크 팬더’의 소행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2007년 6월 일본 긴자의 고급 보석점에 남성 2인조 강도가 들어 여성 직원들에게 최루 스프레이를 뿌리고 진열장의 자물쇠를 부순 후 2억 8000만 엔(약 43억 원) 상당의 보석 왕관과 목걸이를 훔쳐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수사해오던 일본 경찰청은 지난 5일 몬테네그로 국적의 남성 두 사람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인터폴에 국제 수배를 요청했다.
세계 각지에서 ‘핑크 팬더’의 강도행각이 이어지자 인터폴은 ‘프로젝트 핑크 팬더’라는 작전 하에 각국 경찰과의 연계를 통해 ‘핑크 팬더’ 멤버들의 사진과 이름, 범죄 현장에 남겨진 지문과 DNA 등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핑크 팬더’의 일부 멤버들의 신원이 밝혀져 체포됐지만 지금까지 수감된 멤버는 3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10여 년 동안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강도 행각을 저지른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검거율이다.
인터폴과 ‘핑크 팬더’의 본격적인 대결은 이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대결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