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펑크 난 일본의 ‘바퀴’
▲ 도요타 서비스 관리자가 대규모 리콜 사태의 원인이 된 도요타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살펴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우린 지금 렉서스 안에 있어요…시속 190㎞로 달리고 있는데 가속페달이 꼼짝을 안해요. 큰일 났어요. 브레이크도 말을 듣지 않아요. 교차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멈춰, 멈춰, 제발…제발….”
도요타의 대규모 리콜의 비극을 알리는 서막은 지난해 8월 한 건의 교통사망사고에서 시작됐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인근의 고속도로에서 마크 세일러 고속도로교통경찰관과 아내와 딸, 그리고 처남이 급가속으로 의심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세일러 가족이 타고 있던 승용차는 렉서스 ES350이었으며, 렌터카 회사에서 빌린 대여 차량이었다.
ABC 방송을 통해 공개된 911 응급구조대와의 통화 내용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했다.
수사 결과 80㎞로 달리다가 갑자기 190㎞로 속도가 급격히 치솟았던 렉서스는 교차로를 지나 펜스를 뚫고 추락한 후 전복되어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멀쩡하던 차가 갑자기 왜 급가속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당시 미 연방고속도로안전관리국(NHTSA)은 사고의 원인이 운전석 바닥의 매트가 앞으로 밀려 가속페달을 눌렀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으며, 도요타 측 역시 차량의 기계적 결함이 아닌 바닥매트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고 밝혔다. 그리고 렉서스 운전자들에게는 즉시 바닥매트를 교체하거나 치울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렉서스 운전자들 사이에서는 의심과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바닥매트에 책임을 돌리기에는 어째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는 것이었다. 세일러 가족의 변호인 역시 가족보다 3일 전에 같은 차량을 빌려 탔던 한 남성이 렌터카 업체에 “가속페달이 뻑뻑했다”고 불평을 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문제는 바닥매트가 아니라 가속페달의 결함, 즉 기계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속페달의 결함이란 발을 뗀 후에도 페달이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아 계속해서 속도가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라는 운전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결국 도요타는 지난해 10월 렉서스 IS250, ES350을 포함해 캠리, 프리우스, 아발론, 타코마, 툰드라 등 총 380만 대를 리콜했다. 이는 도요타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최대의 규모였다.
하지만 최고의 품질과 안전을 슬로건으로 삼던 도요타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도요타는 리콜의 원인이 바닥매트 때문이라는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점차 NHTSA와 미국 언론들이 ‘바닥매트뿐만이 아니라 가속페달 자체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일 수도 있다’라는 의혹을 제기했고, 소비자들의 신고와 집단소송이 이어지자 결국 1월 21일 가속페달의 결함으로 인해 급발진 및 급가속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시인하고 230만 대를 리콜 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월 27일에는 다시 109만 3000대를 추가 리콜하기로 했다. 이밖에도 중국에서 8만 대, 유럽에서 171만 대, 중동 및 기타 지역에서 18만 대의 리콜을 결정했다.
또한 제동장치 결함에 대한 제보도 잇따르고 있다. 이에 도요타 측은 지난 4일 프리우스의 브레이크 설계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미국과 일본 등에서 27만 대를 리콜하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신형 프리우스 발매 이후 시장에 투입한 하이브리드 차량인 ‘사이’와 ‘렉서스 HS250h’의 경우 프리우스와 같은 브레이크 시스템을 채용한 만큼 리콜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규모 리콜 조치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려는 도요타 측의 노력과 달리 도요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무엇보다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도요타의 안이한 태도 때문이다. 가속페달의 결함이 문제시되자 도요타는 모든 책임을 미국의 부품제조업체인 CTS에게 돌렸다. 문제가 된 차량의 가속페달은 CTS, 즉 미국 현지에서 생산한 것으로 일본에서 생산한 것과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CTS 측의 입장은 달랐다. 항공, 우주, 의료, 방위산업 등 다양한 분야의 전자부품 및 센서를 생산하는 글로벌업체인 CTS는 “부품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자사는 렉서스에는 부품을 납품하지 않고 다른 도요타 차종에 납품하기 때문에 렉서스 급발진 사고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또한 1999년형 도요타 차종과 렉서스에서도 급발진 사고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때는 CTS가 도요타에 부품을 납품하기 전이며, 2005년부터 납품했기 때문에 설명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바닥매트도 아닌, 부품 결함도 아닌 다른 데 원인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차량의 전자시스템으로 인해 급발진 사고가 증가했다는 주장이다. 자동차제조업체들이 과거 케이블이나 호스 등을 사용하는 기계적인 방식에서 점차 전자식 방식으로 바꾸면서 발생하게 된 일종의 소프트웨어 오류라는 것이다. 가령 가속페달의 경우 예전에는 엔진 케이블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점차 센서로 작동되는 전자시스템이 사용되고 있는 추세다. 도요타는 2002년부터 캠리와 렉서스 ES350에 ETCS-i라고 불리는 전자식가속제어시스템을 도입해왔으며, 최근에는 거의 대부분의 차종을 전자식으로 교체하고 있다.
▲ 도요타 아키오 사장 | ||
게다가 얼마 전에는 ‘애플’사의 공동창업자이자 첨단기술 수집광인 스티브 워즈니악까지 소프트웨어 결함 가능성을 제시하고 나서자 도요타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다. 2010년형 프리우스를 타고 있는 워즈니악은 3개월 전 자신의 자동차에서도 가속페달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하면서 “나는 절대로 페달을 밟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속도가 156㎞까지 올라갔다” “이건 분명히 소프트웨어의 문제였다”고 증언했다.
이렇다 보니 항간에서는 도요타가 급발진 사고의 진짜 원인, 즉 전자시스템의 결함을 숨기기 위해서 서둘러 대규모 리콜을 단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아니면 더 나아가 어쩌면 도요타 측에서도 급발진 사고의 진짜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요타가 차량의 결함을 숨긴 혐의로 비난을 산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2006년 일본 남부의 구마모토에서는 도요타의 품질관리 담당 임원 세 명이 레저용 차량 하이럭스 서프의 결함을 숨기고 있다가 뒤늦게 리콜을 실시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1992년 생산된 하이럭스 서프의 운전대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1995~1996년 무렵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쉬쉬하다가 2004년 사고가 발생한 후에야 뒤늦게 리콜을 실시했다는 것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003~2007년까지 캘리포니아 토랜스의 도요타 판매법인에서 근무했던 디미트리오스 빌러 전 변호사의 폭로였다. 지난해 8월 부당해고와 정신적 피해를 당했다며 도요타를 상대로 법적소송을 제기한 그는 도요타가 지난 수년 동안 발생했던 300건의 차량 전복사고와 관련된 사망 및 부상 증거자료를 불법적으로 누락하거나 제거해왔다고 주장했다.
도요타에서 전복사고와 관련된 소송을 담당했던 그는 근무를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측이 원고에 대한 기록이나 이메일 등을 보관하지 않고 삭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소송과 관련된 자료들은 반드시 보관해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회사 측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는 분명 불법적으로 증거를 인멸하려는 의도였으며, 회사의 이런 행태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했던 그는 퇴직금 370만 달러(약 42억 원)를 받고 회사를 떠나야 했다.
현재 그는 도요타의 SUV와 트럭 차종에서 차체가 불안정하고 지붕이 약해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도요타가 차량에 대한 안전 검사를 제대로 실시하지 않은 채 그대로 길거리로 내보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도요타 측은 “사실이 아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면서 그가 회사의 기밀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퇴직금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분명 계약위반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사실 이번 리콜 사태도 빌러 변호사의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실제로 도요타의 급발진 문제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도요타 측은 그동안 자동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일축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리콜 결정을 미루는 데 급급해왔다. <뉴욕타임스>는 이와 관련, “도요타는 가속페달의 결함에 대한 불만이 급증하고 있고, 리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미루면서 은폐해 왔다”고 비난했다.
도요타의 불성실한 태도도 소비자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리콜 파문 이후에도 한참 동안 도요타 측은 공식적인 해명이나 사과 없이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리콜이 실시되기 시작한 1월 21일부터 한참 후인 31일에야 신문에 사과문을 게재했으며, 2월 2일에는 사사키 신이치 부사장이 뒤늦게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인 사과와 더불어 후속대책을 발표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도요타의 오너인 도요타 아키오 사장(53)의 뻣뻣한 태도였다. 지난해 처음 리콜 사태가 터진 후에도 그는 단 한번도 공개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지난달 다보스포럼 참석차 스위스를 방문했을 때 NHK 기자의 질문에 “고객들을 불안하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답한 것이 전부였다.
이런 도요타 사장의 태도에 대해 일본 자동차제조업체 관련 전문작가인 마사키 사토는 “도요타의 가장 큰 실수는 아키오 도요타 사장이 즉각적인 해명을 하지 않아 소비자들의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도요타 사태를 지켜보면서 신이 난 것은 자국의 자동차산업이 일본에 밀려 파산 직전에 놓였다고 생각하는 일부 미국인들과 언론, 그리고 자동차제조업체들이다. 미국 언론들은 앞다퉈 ‘도요타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가 하면, 3년 동안 도요타에 밀려 1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GM과 포드 등은 도요타에 등을 돌린 고객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도요타의 몰락을 예고하기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많다. 실제로 이번 리콜 파문에도 미국의 대다수 소비자들은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ABC 방송이 1월 28~31일 1012명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63%가 여전히 도요타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응답했으며, 72%는 가속페달의 결함은 드문 사고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반면 25%만이 이번 사태로 도요타 자동차를 구매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과연 이번 리콜 파문이 도요타의 추락을 알리는 서곡인지, 아니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싶다.
급발진·급가속 사고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