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S라인’ 이제야 사람 같네
▲ 프랑스 패션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는 2006년 파리 패션쇼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과 함께 대미를 장식했다. 로이터/뉴시스 | ||
패션쇼나 TV 광고 혹은 잡지에 등장하는 모델들을 볼 때면 한편으로는 늘씬한 몸매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날씬하다 못해 앙상하기까지 한 몸매가 비현실적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나라 20대 여성의 평균 체격은 신장 160㎝, 몸무게 54㎏ 안팎으로 모델 사이즈와 현저히 다른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패션 디자이너들과 모델들은 누구를 위한 의상을 만들고 입는 걸까. 최근 세계 패션계에 불고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바람 역시 이런 물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란 이른바 ‘마담 사이즈’ 혹은 ‘통통 사이즈’의 여성을 뜻하며, 미국 사이즈로는 보통 12~14사이즈(M~L)를 입는 모델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사이즈 제로(0)’의 깡마른 모델들이 일반 여성들에게 얼마나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11월, 사람들은 브라질에서 날아온 한 모델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아나 카롤리나 레스톤(21)이 수년 동안 ‘거식증’에 시달리던 끝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사망 당시 그녀는 키 174㎝에 몸무게는 고작 40㎏일 정도로 깡말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다이어트를 계속했으며, 그 결과 신장기능 저하, 고혈압, 호흡곤란 등을 호소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이 세상을 통해 알려지자 패션업계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깡마른 모델들을 무대에서 당장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말라깽이 모델들을 선호하는 디자이너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우루과이 모델 자매가 나란히 거식증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또 발생하자 각국 정부들은 앞다퉈 마른 모델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경우 16세 이하 모델들의 패션쇼 출연을 금지하고 건강검진을 의무화하도록 했으며, 프랑스는 지난해 8월 거식증이나 섭식장애를 유발하는 광고나 출판물에 대한 처벌법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갑자기 불어 닥친 ‘슈퍼 스키니’ 모델에 대한 논란으로 수혜를 입은 것은 다름 아닌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이었다. 말라깽이 모델의 대표격인 케이트 모스를 필두로 90년대 중반부터 불어 닥친 마른 모델의 유행에 밀려 한동안 찬밥 신세였던 글래머러스한 모델들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 들어 더욱 급증하고 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을 향한 유명 디자이너들의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는가 하면, 패션잡지에도 다양한 신체 사이즈의 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6년 장 폴 고티에의 파리 패션쇼의 대미를 장식한 모델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 가운데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고 있는 크리스탈 렌(21)이었다. 존 갈리아노의 패션쇼에서는 프랑스 출신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인 요하나 드레이가 등장해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최근에는 패션잡지
캔디스 허핀, 타라 린, 마르키타 프링, 미셸 올슨, 카시아 P 등 5명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이 알몸이나 수영복, 혹은 브래지어에 청바지만 입은 채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사진들은 금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사이즈 제로인 재클린 야블론스키와 동일한 사이즈의 의상을 입고 비슷한 포즈를 취한 렌의 사진들은 ‘누구나 같은 사이즈의 옷을 입을 수 있다’라는 문구와 함께 통통한 여성들의 자긍심을 부추기고 있다.
여성들의 처진 뱃살과 튼튼한 허벅지도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증명하고자 한 이 잡지는 “2010년에는 더 이상 사이즈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크거나 작거나, 혹은 마르거나 통통하거나 모든 몸은 아름답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진들을 본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현재 찬반 의견이 팽팽한 상태. 드디어 현실적인 몸매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왔다며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만을 미화하거나 잡지 홍보를 위해 모델들의 뚱보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최고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는 렌 역시 이런 주장에 동의했다. 그녀는 키 175㎝, 몸무게 74.8㎏에 허리둘레가 30인치인 지극히 평범한 몸매의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분류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말한다. 렌은 지난해 9월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 <헝그리>에서 “보통 여성들이 오늘날 비만으로 간주된다니 정말 이상하다”고 말했다. 미국 여성들의 평균사이즈보다 작은 사이즈인 12를 입는 그녀는 비록 자신이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 자신을 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전혀 뚱뚱하지 않다”며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광고나 잡지의 사진을 본 일반 사람들이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을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렌은 사진작가들이 일부러 모델들이 더 뚱뚱하게 보이도록 포토샵으로 보정하거나 조명을 이용해서 몸매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일이 많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진 역시 사이즈 20으로 보이도록 종종 수정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모델들이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서 허리나 허벅지 라인을 포토샵으로 깎는 데 비해 반대로 이들은 살이 쪄 보이도록 고친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글래머> 잡지에 실린 단 한 장의 알몸 사진으로 유명해진 리지 밀러(20) 역시 자신이 왜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간주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약간 처진 아랫배와 통통한 허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몸매에 대한 자신감과 플러스 사이즈의 모델에 대해 다룬 이 기사에서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이탈리아의 유명 마담사이즈 의류업체인 ‘마리나 리날디’로부터 “플러스 사이즈의 옷들을 입기에는 너무 뚱뚱하다”며 거절당한 사연을 소개했다. 그녀는 신장 180㎝에 79㎏의 몸무게로 사이즈 12~14를 입는 평균 내지는 평균을 약간 웃도는 체격을 갖추고 있다.
밀러는 자신을 뚱뚱하다는 이유로 거절한 ‘마리나 리날디’는 8~10사이즈를 입는 모델들을 원했다고 말하면서 “슬프다. 모델업계에서 6사이즈 이상은 플러스 사이즈로 간주된다”고 말하면서 현실을 비난했다.
하지만 밀러의 알몸 사진이 실린 <글래머> 잡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많은 사람들이 마른 모델들을 편애하는 패션계의 실태를 비난했으며, 잡지사 측은 “앞으로 더 많은 보통 몸매의 모델들 사진을 싣겠다”고 약속했다. 밀러 역시 그 후 여러 패션 브랜드나 디자이너로부터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으며, 에이전시 역시 그녀에게 ‘더 이상 살을 빼지 말라’고 당부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 대한 호감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얼마 전 미국의 인기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도전! 슈퍼모델>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시즌 10에서 예상을 뒤엎고 통통한 몸매의 도전자가 우승을 차지해서 화제가 됐던 것이다. 사이즈 10을 입는 휘트니 톰슨(20)은 우승 당시 177.8㎝의 키에 몸무게 72㎏, 그리고 허리둘레는 30인치인 다소 풍만한 몸매였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예전보다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자칫하면 비만까지 용서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은 자신들이 비록 통통하긴 하지만 운동을 게을리 하거나 나쁜 식습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