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두 번 죽인 ‘늑장 대응’
▲ 2000년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폭발사고로 침몰한 지 14개월 만에 인양돼 2001년 10월 무르만스크항 근처 부두에 정박해 있는 모습. 아래는 누더기가 된 잠수함 내부(왼쪽)와 사고 당시 상황을 쪽지로 남겼지만 결국 시신으로 발견된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 중위. EP | ||
구소련 시절부터 핵잠수함 강국으로 명성을 날린 러시아는 그만큼 크고 작은 사고 또한 많이 발생해서 여러 차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1960년대 이래 20여 척의 잠수함이 침몰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개는 함내의 어뢰 폭발이나 다른 선박과의 충돌, 혹은 승조원의 기관 조작 실수 등의 이유로 비극을 맞았다.
심해를 잠항하는 잠수함의 특성상 잠수함은 한번 침몰했다 하면 거의 대부분의 승조원들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를 초래한다.
지금까지 러시아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냈던 사건을 꼽으라면 지난 2000년 8월 침몰한 쿠르스크 호 침몰 사건을 들 수 있다. 핵잠수함 K-141이라고도 불리는 쿠르스크 호는 구소련 시절 건조된 것으로 최대 24기의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하고 수심 500m까지 잠항할 수 있는 최신예 잠수함이었다. 또한 4층 건물 높이에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으며, 2중 강철로 이루어진 선체 덕분에 안정성 면에서도 기존의 잠수함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하지만 지난 2000년 8월 12일 ‘절대 침몰 불가’라는 예상을 뒤엎고 구소련의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낸 사건이 발생했다.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훈련 중이던 쿠르스크 호가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해저 108m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사고로 인해 승조원 118명 전원이 사망했으며, 인양된 후에 건진 시신도 12구에 불과했다. 함수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그쪽에 몰려 있던 군인들 대부분이 폭발과 함께 공중으로 분해됐던 것이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처음에는 미국이나 영국의 잠수함과 충돌했다고 주장했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며 반박했다. 두께 40㎝의 2중 강철로 이루어진 쿠르스크 호가 그 정도의 충돌로 침몰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년 후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침몰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함내의 어뢰에서 불량연료가 누출되어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폭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어뢰의 압축가스로 사용된 과산화수소에 있었으며, 이로 인해 어뢰 2기가 연속으로 폭발해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더 불러일으켰던 것은 승조원들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침몰 후에도 한동안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3명의 승조원들이 과연 함내에서 얼마나 버티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구조작업이 조금만 빨리 진행됐어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러시아인들은 정부의 늑장대응과 안이한 대처에 분통을 터뜨렸다.
침몰 후 생존자가 있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은 인양된 시신 한 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쪽지를 통해서 알려졌다.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 중위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쪽지에는 사고 발생 후 함내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나타나 있었다.
▲ 2001년 미국 잠수함 그린빌(위)과 충돌한 일본 에히메마루호는 10분 만에 침몰해 9명이 사망했다. | ||
처음에는 또박또박 쓰인 글씨가 끝으로 갈수록 휘갈겨진 것으로 미루어 글을 쓰는 도중에 비상등이 꺼진 것으로 추측됐으며, 쪽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감각에 의지해 글을 쓴다. 이제 가망이 없을 것 같다. 누군가 이 글을 보기만 해도 좋겠다”라고 적혀 있었다.
생존자들이 얼마나 오래 살아 있었는지, 산소 부족으로 인한 질식사였는지 아니면 함내로 스며든 해수 때문에 익사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쪽지로 인해 몇 가지 사실은 확인됐다. 가령 러시아 해군은 침몰 즉시 구조작업을 벌였다고 주장했지만 쪽지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그렇지 못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선체를 두드려서 생존자가 있는지를 살폈다는 러시아 해군의 주장과 달리 콜레스니코프의 쪽지에서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당시 러시아 정부와 해군의 태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처음 서방 언론을 통해 사건이 보도된 후 이틀이 지나서야 침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이미 모두 사망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영국이나 노르웨이 등의 도움을 거부했었다.
2003년 발간된 <타임 투 다이-쿠르스크 호 비극의 숨겨진 이야기>의 저자인 영국의 로버트 무어 기자 역시 책에서 “쿠르스크 호 침몰은 예정된 비극이었다”고 말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잘못된 결정과 정치적 실수로 118명의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최초의 러시아 핵잠수함 침몰 사고는 1970년 4월 발생했다. 당시 스페인 연안 비스카야만을 잠항하던 중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수면으로 떠오른 핵잠수함 K-8은 결국 화재를 진압하지 못한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으며, 당시 사고로 함장을 포함해 모두 52명이 사망했다.
1983년 발생한 핵잠수함 K-429 침몰 사고는 승조원들의 미숙한 기계 조작과 실수로 인한 인재였다. 훈련 일정의 변동으로 여기저기서 차출한 승조원 120명 가운데 3분의 1은 K-429 승선 경험이 없었으며, 대다수는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잠항하던 K-429는 결국 침몰했고, 14명의 승조원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밖에도 1986년에는 대서양 버뮤다 해역에서 미사일 발사관이 폭발해서 침몰한 K-219 사고로 세 명이 사망했는가 하면, 1980년 콤소몰레츠 호(K-278)는 노르웨이 북쪽 해협을 잠항하다가 갑자기 발생한 화재로 함내에 해수가 스며들어 침몰했다. 잠시 해수면 위로 부상했지만 결국 화재 발생 6시간 만에 해저 1655m로 가라앉았으며, 승조원 69명 중 42명이 사망했다. 당시 승조원 대부분은 비상보트가 부족해 바닷물 속에서 버티다가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1968년 대서양 북부 아조레스 해역에서 침몰한 스콜피온 호의 승조원 99명 역시 전원 사망했으며, 사고 원인으로는 잠수함에 탑재되어 있던 어뢰 폭발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소련 잠수함에 의한 공격으로 침몰됐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대두되는 등 아직도 명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잠수함과 민간인 선박이 충돌해서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2001년 하와이 오아후 섬 인근 앞바다에서 미국의 공격용 잠수함 그린빌과 일본 수산고교 실습선인 에히메마루 호가 충돌해서 일본인 실습생 등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린빌이 해수면 위로 부상하다가 근처를 항해하던 에히메마루 호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들이받았던 것이다.
그린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충돌한 지 10분 만에 침몰했던 에히메마루 호의 승객 35명 가운데 9명은 실종됐으며, 후에 8명의 시체만 발견됐다. 이 사고로 일본인 피해 가족들은 미 해군으로부터 1300만 달러(약 146억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군함과 민간 어선이 충돌하는 민망한 사고가 두어 차례 발생했다. 1988년 해상자위대 잠수함 나다시오 호가 낚싯배와 충돌해서 30명이 사망했고, 2008년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최첨단 이지스함인 아타고 호가 참치조업을 하던 소형 어선이 접근하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어선은 충돌 후 두 동강난 채 침몰했고, 어부 2명이 실종됐다.
중국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잠수함 361호 침몰 사고는 2003년 4월 서해에서 발생했다. 훈련 중 갑자기 균형을 잃은 잠수함이 해수면 위로 잠시 부상했다가 빠른 속도로 침몰했으며, 승조원 70명이 모두 사망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혹만 무성하다. 승조원의 기계 조작 실수 혹은 축전지에 해수가 스며들어 발생한 염소가스에 의한 질식사 혹은 수심이 100~200m로 너무 낮아서 발생한 충돌 등 여러 가지 설이 대두됐지만 중국 정부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밖에도 영국에서는 1968년 지중해를 항해하던 다카로 호가 침몰해 승조원 69명이 전원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으며, 이보다 앞선 1955년에는 사이던 잠수함에서 어뢰 1기가 폭발해 1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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