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왕산 정면에 우뚝 솟은 ‘기암’이다. 왼쪽은 대전사. | ||
경북 청송의 주왕산(720m)도 예외는 아니다. 전설이 풍성한 주왕산은 이번 주부터 시작해 11월 하순까지가 단풍의 절정기다. 놓칠 수 없는 가을 단풍과 오지마을의 넉넉한 인심을 함께 만끽하면서 주왕산에 가득한 ‘가을의 전설’을 느껴보자. 산 기슭에 숨겨진 ‘주산지’의 비경은 안보면 손해요, 보고 나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주왕산은 우리나라 5대 오지의 하나인 청송(靑松)군에 속해 있어 다른 국립공원에 비해서나 기암절벽을 이루는 산의 위용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대개의 명산이 그렇듯이 주왕산은 볼수록 매력적이다. 특히 단풍산행이 시작되는 늦가을에는 소문 듣고 찾아온 등산객들이 줄을 잇는다. 단풍뿐 아니다.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석벽이 둘러싼 숲속의 비경은 예로부터 석병산으로 불렸을 만큼 위엄이 넘친다.
월출산, 청량산 등 바위산들이 대개 물이 귀한 편이지만 주왕산은 계곡마다 쉼 없이 물줄기가 흘러 절경을 이룬다. 웅장하고 아찔한 외경과 달리 맑은 계곡을 좇아 오르는 순탄한 등산로가 많다. 비교적 단풍이 늦은 이곳은 10월 말부터 11월 하순까지가 단풍의 절정으로, 벌써부터 석벽을 따라 오색단풍 행렬이 볼만하다.
국립공원 대전사를 지나 주방천계곡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등산이라기보다는 트레킹 장소로 더 알맞다. 평지를 걷는 듯하면서 오르막에 이르는 이상야릇한 등산길이 가족단위 등반객을 불러모은다. 주왕산은 ‘전설의 산’이다.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전설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중에서도 산 이름의 유래와 관련된 주왕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주왕은 중국 진나라의 ‘주도’라는 사람을 일컫는다 한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쯤에 해당하던 시대에 그는 성인이 되면서 후주왕후를 꿈꾸었지만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결국 당나라 덕종 12년 패잔병을 이끌고 신라로 넘어왔다고 한다. 그가 최후의 은신처로 택한 곳이 이곳 석병산. 이후 주왕산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주왕산에 들어서면 정면에 가장 먼저 보이는 바위가 기암(旗岩)이다. 주왕이 은거할 때 당과 신라의 추적군들과 싸움이 시작되면 이 바위 봉우리에 깃발을 꽂아 놓고 방어군끼리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기암은 한순간에 위엄과 기개로 등산객을 압도하며 주왕산의 첫인상을 결정짓곤 한다. 건너편 능선 위의 바위는 주왕의 전방 진지였다 하여 장군암이라고 부른다.
▲ 산속에 숨겨진 인공호수 ‘주산지’는 안보면 후회하는 비경 이다 | ||
주왕이 폭포수에 세수하러 나왔다가 신라 마장군 형제들에게 포위되어 최후를 맞았다는 곳이기 때문이다. 철퇴를 맞았다고도 하고 화살에 쓰러졌다고도 한다. 깊이 2m 정도의 굴속 구석에는 탱화가 쓸쓸하게 안치되어 있다.다시 제1폭포 쪽으로 길을 잡고 보면 망월대라는 전망대를 만난다. 이곳에 서면 연화봉, 병풍바위, 시루봉, 급수대가 왼쪽부터 차례로 늘어선 모습에 숨이 막힌다.
제1폭포로 가는 길로 내려와 연화교에서 다시 올려다 본다. 주왕이 계곡물을 올려다 썼다는 급수대, 학소대, 인자한 할아버지 얼굴을 하고 있는 시루봉을 연화교에서 올려다보는 맛은 언제나 아찔하다. 거대한 암봉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듯하고 인간은 그 앞에서 아른거리는 한 점일 뿐이다. 주변을 빨갛게 물든 단풍이 뒤덮고 있다. 이 길이 제2, 제3폭포로 이어진다.
제3폭포 끝에 이르면 ‘전기 없는 내원마을, 여기서 10분거리’라는 자그마한 표지가 나온다. 하지만 초행길이라면 여기서부터 대개 20분 정도 걸린다. 익숙치 않은 산길인 데다 길인지 아닌지 의구스러워 자꾸만 걸음을 주춤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내원마을은 아홉 가구 정도가 생활하고 있는 오지마을로 아직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지만 여전히 오지마을이다.
마을의 얼굴은 20년 전 폐교된 내원분교의 아담한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산악구조대원으로 활동해온 이상해, 김희숙씨 부부로 오래 전부터 이곳에 텃밭을 가꾸며 살아왔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조용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해질 무렵까지 주인이 직접 담은 동동주며 천일초차, 국화차 등 약초로 만든 차를 즐기며 전기없는 숲속의 밤을 맛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국립공원이라 개별 취사가 안되므로 주인이 직접 재배한 채소들로 만든 산채비빔밥, 도토리묵, 감자전 등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숙박을 하는 손님이 있다며 장작으로 군불을 때고 있던 이상해씨는 “주말에는 숙박손님이 많고, 평일에도 들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한다.
주말저녁이면 주인이 직접 기타를 들고 등산객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주왕산의 전설을 주저리주저리 펼쳐놓기도 한다. 무료공연을 자청하며 정기적으로 내원마을을 찾는 가수가 있을 정도로 주인과 단골들 사이에 격의가 없다. 전화도 전기도 없어 달리 내원마을과 연락할 방법은 없으며 숙박을 위해서라면 해가 지기 전 산장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 협곡을 따라 3백m의 철계단을 오르면 주왕굴에 이른다. (오른쪽) | ||
그 뒤는 주왕산 줄기가 아늑하게 병풍을 치고 물속에는 1백50년 넘게 자란 고목들이 서있어 전설 속의 한 장면 같다. 어쩌면 동화 속에 나오는 착한 괴물이 살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신비롭다. 다리를 물 속에 감춘 왕버들과 능수버들은 저수지에 물이 담기기 전부터 자생하고 있던 것이다.
저수지 한 가운데 웬 절집 건물이 서있다. 실은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영화를 위해 만든 세트다. 환경부와 청송군의 허락을 받고 설치해 2003년 봄까지 기한으로 남겨두었다는데, 주산지의 사계가 담긴 영화는 곧 공개될 예정이다.
주산지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녘이 가장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봄, 가을의 경치가 더욱 좋고 날씨 좋고 바람 없는 날 물 그림자가 있는 풍경을 보게 되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 따라야 한다고. 예전에는 사진 동호회들이 열심히 찾아들더니 최근에는 연구생, 노부부, 일반 등산객까지 평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오면서 왕버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저수지 풍경을 담아오더라도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주산지가 오래도록 살아 숨쉬려면 말이다.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054-873-0014. 탐방안내소 873-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