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남화의 성지라 일컬어지는‘운림산방’. 연못에 담긴 점찰산의 자태가 한폭의 그림처럼 곱다. | ||
진도는 사시사철 푸르다. 겨울 내내 따스한 햇살이 빛나고 그 햇살 받아 자란 대파와 월동배추가 녹색융단을 이루는 곳이 진도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 파릇파릇한 배추밭을 따라 그저 몸을 내맡기기만 하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오는 것도 잠깐이었다.
그렇게 오가던 진도의 봄이 올해만큼은 예외다. 강풍을 동반한 함박눈 세례를 맞으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 끝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눈 때문에 봄동이 얼고, 대파도 얼었지만 워낙 눈이 귀한 곳이다 보니 이곳 사람들은 그리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설을 앞두고 내리 삼일 밤낮을 눈과 함께 얼어있던 진도의 겨울은, 눈이 그친 다음날 아침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한바탕 감기몸살을 앓고 떠나버린 겨울 뒤로 다시 푸른 하늘 아래 원형 그대로의 진도가 파릇파릇하게 빛난다. 싱그러운 진도의 봄날은 진도의 첫 관문이자 쌍둥이 다리로 거듭나고 있는 진도대교에서 출발한다.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의 물소리가 명랑하다.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3백30척 왜선을 무찌른 명랑대첩지. 거센 파도 소리가 눈으로 느껴질 만큼 힘차게 들리는 곳이다.
화려한 볼거리와 넘치는 이야깃거리가 진도 사방에 널려 있지만, 진도대교 끝 망금산 녹진전망대만큼은 꼭 들러보자. 쌍둥이 다리로 화려하게 변신중인 진도대교는 물론 다도해의 섬들이 조각배처럼 떠다니며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넘실거리는 파도를 따라 봄이 졸졸졸 가슴 속에 녹아들기 시작하면 진도 내륙과 해안선을 따라나선 다도해의 절경들이 못다핀 동백꽃처럼 살포시 고개를 들어줄 것이다.
진도는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중앙에서 유배된 선비들이, 군 단위로는, 가장 많이 내려왔던 곳이다. 하지만 오늘 날 진도는 한해 농사로 3년을 먹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기름진 땅이요, 관광자원 역시 풍부하여 축복받은 땅 가운데 하나다.
일년에 한 번씩 ‘모세의 기적’을 보여주는 신비의 바닷길이나 자신의 주인만을 죽을 때까지 따르는 진돗개의 충정은 물론이요, 진도 아리랑이나 씻김굿, 남화(남종화라고도 하며 당시 추상적인 북중국의 화풍에 비해 남중국의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화풍을 뜻한다) 등과 같은 유무형의 관광자원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하다못해 진도에서는 허름한 식당에 가도 이름 한 번은 들었음직한 작가의 서예 작품이나 동양화 한 점은 필수적으로 걸려 있다. ‘글(書)로써 예(藝를)를 이룬다’는 뜻의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서예의 대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나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 선생의 뿌리도 이곳에 있다.
▲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바라본 일몰(위)와 진도 마을의 평화로운 전경(아래). | ||
유배지로 알려진 진도에서 시(詩) 서(書) 화(畵)가 발달된 이유는 무얼까. 그 배경에 대해 진도군의 문화유산 해설사로 활동중인 향토사학자 박명석씨는 아주 재밌는 풀이를 했다.
“진도의 시서화는 유배문화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학자급 이상의 인재들이 이곳에 대거 유배되었고 그들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인 ‘붓’을 통해 회한과 슬픔의 시간을 시와 글,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몇 십 년 혹은 평생을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양반문화였던 글 그림 시가 진도 땅에 뿌리내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유배문화뿐 아니라 그 문화를 전수받아 잘 보전해온 개인들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임회면 남진미술관은 소전의 제자였던 장전 하남호 선생의 개인 소장품으로 세워진 미술관인데, 그림이나 글 좀 한다 하는 예술가들은 안 다녀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미술 진품들이 다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와 사비를 들여 미술관을 지은 뒤, 아직까지도 불편한 몸으로 글을 쓰는 장전 선생을 만날 수 있어 그 감격은 매우 남달랐다. ‘남진’이라는 미술관 이름에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평생을 희생해온 부인 곽순진 여사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름의 중간자를 하나씩 더한 사연도 숨겨져 있다.
“인생이 이렇게 짧은 것도 모르고 선생님은 평생 미술품을 모으기만 했어요. 이곳에 올 때가 제 나이 61세였는데 그때부터 꼬박 10년간을 미술관 짓는 데 보냈네요.” 몇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큰 고비를 넘긴 장전 선생이 곽순진 여사와 눈을 맞추며 그 긴 세월을 반추하듯 눈시울을 붉힌다.
진도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은 한 편의 서사시 같다. 먼저, 운림산방과 쌍계사를 감싸고 있는 점찰산 주변은 해설자의 말에 따르면 ‘단번에 석 줄짜리 시가 완성되는 곳’이다. 쌍계사에서 연결되는 등산로를 따라 약 50m만 가면 동백나무 후박나무 붉가시나무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약 50여 종의 상록수림이 모여 있으며, 고풍스런 쌍계사와 어울려 더욱 운치가 있다.
날씨가 맑으면 점찰산 기상대 꼭대기까지 차를 몰고 가도 좋다. 고개마다 푸른 대파가 잔디처럼 넘실대며 춤을 추니, 마치 길손을 반기는 듯하다.
고군면의 자랑인 ‘신비의 바닷길’(진도 영등제가 펼쳐지는 곳)을 지나고 길이 다시 바다로 멀어지면 의신면의 접도에 잠시 들러보자. 아무도 손대지 않은 원시의 섬 접도는 진도 사람들이 추천하는 ‘진짜 보물’ 가운데 하나다.
접도에서 서쪽 방면을 따라가면 수품항이라는 작은 항구가 나타나는데 오래전 사진 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때 묻지 않은 삶이 닻을 내리고 있다.
▲ 장전 하남호 선생의 남진미술관(위)과 봄을 알리는 푸릇푸릇한 배추밭(중간), 진도의 첫 관문 ‘진도대교’. | ||
전망대는 여기서 10여 분을 오르내린 뒤에야 다도해의 섬을 안고 나타난다. 전망대 바로 앞의 장도를 비롯해 주지도(일명 남근섬) 양덕도(여근섬) 혈도 송도 광대도 등이 수묵의 진경으로 펼쳐지는 기막힌 순간이다. 세방의 풍경은 때로는 소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장엄하기도 하여 다채로운 얼굴을 자랑한다. 날씨가 맑은 날 뚜렷한 일몰도 좋지만 약간 흐린 날 구름 사이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일몰은 더 황홀하다는 게 지역주민들의 얘기다. 세방에 도착하기 전 급치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풍경도 추천할 만하다.
아직도 ‘진도를 보았다’고 하기에는 이르다. 오래도록 정을 나누며, 천천히 알아가고픈 곳. 누가 알겠는가. 그저 진도의 동쪽부터 서쪽까지 천천히 달리다가 내리고 싶은 곳에 닻을 내리다 보면, 구수한 진도아리랑도 듣게 될지 말이다.
진도는
▲교통: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영산호 하구둑-영암방조제-금호방조제-77번 국도-해남군 문내면-진도대교
⑵호남고속도로 광산IC-나주-영암-강진군 성전면-13번 국도-해남-진도대교.
▲별미 & 숙박: 제진관(간재미찜, 061-544-2419), 의신면 제일음식점(곰탕, 543-4107). 진도 태평모텔(542-7000), 대동모텔(542-2251) 진도마린빌리지펜션(544-7999)
▲문의: 진도군청 문화관광과 061-544-0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