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반기고 바람 춤추는 ‘황톳길 10km’
▲ 문경새재 길. | ||
마음이 답답하거나 삶이 팍팍하게 느껴진다면 문경새재, 그 호젓한 옛길을 걸어보라. 알싸한 향기를 내뿜는 적송과 큰 키의 물박달나무가 그늘터널을 만들어 더욱 아늑한 곳, 길과 벗하며 달리는 계곡물과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청량한 이곳에서라면 세상의 시름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길은 생물이다. 마치 사람처럼 젊어서는 제 몸을 더 멀리 더 크게 키우고, 때가 다 하면 새로 난 길에게 그 소임을 물려준 후 조용히 안식을 취하는 법이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영남의 관문 노릇을 하던 ‘문경 새재’도 철도와 고속도로라는 새 시대의 길이 생기면서 어느덧 길의 존재감을 잃었다. 하지만 새재의 노년은 그리 쓸쓸하지 않다.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 이어지는 시오리 새재 길, 비록 예전의 영화는 모두 포기해야 했지만 황토 보드라운 옛길로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이다.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서 새재, 혹은 새(억새)가 우거진 고개, 서울로 가는 샛길, 하늘재와 이유릿재 사잇(새)고개…. 새재를 이르는 말이 참 많기도 하다. 새재는 부산 동래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길로 백두대간의 조령산 고갯마루에 걸쳐 있다.
새재의 총 길이는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부터 제2관문 조곡관을 지나 제3관문 조령관까지 6.5km. 제2관문이 임진왜란 당시인 1594년에 먼저 지어졌고, 1백여 년 후인 1708년 1, 3관문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새재는 최고점의 해발고도가 643m의 높은 고갯길이지만 생각보다 험하지는 않다. 길이 평평하게 잘 닦여 있고 그 경사도 완만해서 산책하듯 설렁설렁 걸을 만하다.
▲ 제2관문인 조곡관(위),와 폐철로를 이용한 철로자전거 | ||
주흘관에서부터 조곡관까지는 3km로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새재는 볼거리가 많기로도 유명한데, 이 사이 구간에는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세트장과 조령원터, 주막, 교귀정 등이 산재해 있어 눈이 심심하지 않고, 길옆을 흐르는 계곡도 수려해서 지친 다리를 쉬어가기에 더없이 좋다.
<태조 왕건> 촬영세트장은 주흘관에서 2백m쯤 가면 있다. 2만여 평의 대지 위에 왕궁 2동과 기와집 41동, 초가집 40동의 건물로 이뤄진 <…왕건> 세트장은 어느덧 새재의 명물의 되었다.
사실 새재는 이 세트장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가는 동네 강아지들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던 문경은 탄광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그 좋던 시절과 작별을 고해야 했다. 사람도 떠나고, 찾는 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동네. 그게 바로 얼마 전까지의 문경이었다. <…왕건> 세트장이 들어서면서 새재가 더불어 알려지고, 문경도 활기 찬 동네로 거듭나게 됐다. 지자체들이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 유치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길을 재촉해 세트장에서부터 다시 8백여m를 가면 조령원터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새재를 넘는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당시의 건물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태조 왕건> 촬영을 목적으로 궁예가 기거했던 산채를 새로 지었다.
조령원터 근처에는 주막과 교귀정이 있다. 주막은 비록 새로 지었지만 옛길의 정취를 더한다. 교귀정은 새로 부임한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하던 정자. 옛 시인과 묵객들이 쉬어가던 바람 좋은 쉼터이기도 하다.
교귀정 앞에는 ‘용추’라 불리는 계곡이 있는데 발을 담그며 놀기에 좋다. 얼마 걷지도 않았지만 물소리에 마음이 동했기 때문일까. 잠시 땀을 핑계 삼아 너럭바위에 엉덩이를 붙이는 길손들이 많다.
▲ 신라 초기 축조된 후 증개축된 고모산성. 문경 8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는 진남교반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곳이다(왼쪽). 주흘관과 조곡관 사이 새재길 옆 너럭바위가 있는 용추계곡. 용추는 용이 오른 곳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이 즐겨 찾았던 경승지다. | ||
조곡관에서부터 조령관까지는 3.5km. 1시간30분쯤 잡으면 넉넉하다. 이 사이에는 문경새재 아리랑비와 조령관 바로 옆에 있는 것으로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이 대기하던 군막터 등이 있다.
‘문경 새재 넘어를 갈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았는지 새재아리랑 자락은 구슬프기 짝이 없다. 노래가사를 되뇌며 걷다보면 새재의 굽이마다 덕지덕지 묻은 그들의 애환이 보이는 듯도 하다.
아리랑고개를 넘어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새 조령관. 충북과 경북의 경계다. 이곳을 넘으면 바로 충주다. 4.5m의 석성벽에 올라 걸어온 굽이굽이 고갯길을 다시금 돌아보며 땀을 식힌다. 새재의 가을하늘은 유달리 푸르다.
새재 말고도 문경에는 걷고 싶은 길이 또 있다. 바로 고모산성길이다. 고모산성은 오정산 능선을 따라 세운 석축산성. 해발 231m 되는 북쪽 산봉우리를 기점으로 산 능선을 마름모꼴로 잇고 있다.
고모산성의 축성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모할미와 고부할미가 경쟁을 하며 하룻밤 새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이 산성은 신라 때 방어선을 구축했던 곳이라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때 지어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산성의 둘레는 1,256m. 현재 성안으로 통하는 길은 5개소가 있는데 성문이 있었던 곳으로는 통문과 남문터가 남아 있다. 보통 진남루를 이용해 고모산성에 오르게 되는데, 산성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지만 그 앞 진남교반을 관망하는 즐거움도 크다.
푸른 강물 뒤로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절벽이 아름다운 진남교반은 문경8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힐 정도. 여름이면 올갱이를 잡으며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과 가을철이면 단풍구경을 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모산성의 ‘토끼벼루’를 통해 진남교반으로 내려갈 수 있는데, 토끼벼루는 험하기로 유명한 옛길이다. 겨우 토끼 하나가 지나갈 만한 작은 길이라고 해서 토끼벼루로 불리는데, 태조 왕건이 바위를 자르고 난간을 만들어 2km의 돌사다리길을 열었다.
문경여행의 또 다른 재미는 철로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철로자전거는 10여 년 전 폐역사가 된 진남역 철로를 이용한 아이디어 상품. 어른 2명과 12세 이하 아이 2명 등 4명의 가족이 탈 수 있는 이 자전거는 양 옆에서 자전거 페달을 돌리듯 밟으면 철로를 타고 나아가게 되어 있다. 요금은 대당 3천원.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달리다보면 왕복 4km 거리가 그렇게 짧게 느껴질 수가 없다.
여행안내
★문의 : 문경새재도립공원http://saejae.mg21. go.kr 054-571-0709, 진남역 054-550-6478
★가는 길 : 중부고속도로-호법분기점-영동고속도로-여주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새재IC
★숙박 : ‘문경관광호텔’(055-571-8001)이 제1관문 근처에 있다. 진남교반 근처 ‘강이 있는 풍경’(054-572-3375) 펜션과 ‘가인강산’(054-553-8886)이라는 민박집도 깔끔하고 괜찮다. 그외 호텔 및 여관 관련 정보는 문경시청 홈페이지 참고.
★먹거리 : ‘깊은 산속 활어구이’(054-571-7978)-목초로 키운 활성산 돼지 고추장양념구이(1인분 5천원), ‘왕건식당’(054-571-8857)-참쌀과 영지 구기자 등 여덟 가지 약초로 담은 왕건주(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