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문인이 주도한 사회였다. 선비 덕목 중에도 글 짓는 재주(詩)를 맨 앞자리에 두었고, 생각한 글을 표현하는 붓글씨 솜씨(書)를 다음 자리에, 그리고 그림 그리는 일(畵)은 남은 재주를 풀어내는 것으로 여겼다. 이런 탓에 조선시대 회화 중에는 문인들이 그린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문인화’라 부른다. 중국 영향에서 자라난 문인화는 조선 말 추사를 중심으로 북산, 고람 같은 이들에 의해 신감각 산수라는 독보적 회화를 일구었다. 따라서 문인화는 우리 그림의 중심에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문인화를 버리고 있다. 한국미술 근간을 허무는 일로 자기 부정의 역사를 쓰고 있는 셈이다. 현대미술이라는 명분으로. 최형주는 이런 세태를 뒤집는 통쾌한 예술을 추구한다. 문인화의 혁신을 통해 한국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필묵의 힘과 색채 감각 그리고 서양의 구성 방식을 융합해 최형주식 문인화를 보여준다.
열정: 138×75cm 한지에 수묵담채 2017
이런 시간의 모습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은 절벽이다. 절벽은 지구의 나이를 보여준다. 켜켜이 쌓인 지층은 수천 혹은 수억 년의 시간을 축적하고 있다. 지질학적 시간이다. 절벽에는 지질학적 시간이 지층으로 굳어있다.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시간과는 너무 다른 감정을 준다.
빛의 속도로 날아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별들이 속한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법칙 속에 있다. 천문학적 시간이다. 이를테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우리는 무심히 바라본다. 그 중 300광년 떨어진 별을 보고 있다고 치자. 우리 눈에 들어온 그별이 지금 이 순간 그 자리에 있을까.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300년 전의 모습이다. 이처럼 인간의 시간으로 별을 재단하면 허무할 뿐이다.
이런 시간을 미술에서는 어떻게 그려냈을까. 서양미술에서 시간은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중세부터 의인화된 시간이 그림에 등장했지만,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경이다. 날개가 있고, 낫과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다. 시간을 신격화했던 고대 문화 영향이다.
Khora-171109: 53.0X45.5cm mixed media 2017(왼쪽), Khora-171122: 110X110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그러면 그의 문인화는 기존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
그의 그림을 보면 필력 좋은 작가가 먹으로 그린 추상화처럼 보인다. 물론 문인화의 기본 소재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형상은 변형된 모습으로 스며들어 있다. 그런 형상은 붓의 힘을 담뿍 담은 구성의 중심 요소로 드러난다. 이는 문인화의 소재를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지는 창작의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작가의 생각에서 나온다. 자연 형상에서 기하학적 구성 요소를 찾으려 했던 서양 추상회화의 출발점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배경의 추상적 붓질에 의해 화면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난다. 작가는 ‘자연 속의 형상이 보이지 않는 기운-물리적으로는 바람 같은-과 화합해 생명 에너지로 보인다’는 생각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현대 문인화로 부르는 데는 서예의 필법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서예는 일정한 구성을 염두에 두고 밑 작업 없이 한 번에 조형을 완성하는 예술이다. 서예의 예술성은 서양미술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195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추상미술운동 중 타시즘이 있다. 작가의 자유로운 붓놀림을 중히 여기는 경향이다. 필력과 거친 붓 터치, 붓에서 떨어져 생긴 점 등으로 그림을 만드는 방법이다. 종이에 붓으로 글씨를 쓰듯 밑그림 없이 한순간에 무엇인가를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숙련된 손놀림과 순식간에 빈 화면을 구성할 수 있는 직관력 없이는 불가능한 그림이다. 서예의 기본인 직관적인 제작 태도를 서양에서 따라한 셈이다. 그래서 타시즘을 ‘서법적 추상’이라고도 부른다.
Drawing-盜(훔칠 도): 35×46cm 한지에 수묵담채 2017(위), 探道(탐도)-方(모 방): 35×45cm 한지에 수묵담채 2016.
그의 작업은 서예의 필력을 바탕으로 한 직관성과 서양의 계획적 구성력이 절묘한 융합을 이룬 결과다. 문인화의 전통적 요소에 서양의 조형적 구성 법칙을 접목한 최형주식 문인화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전준엽 화가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