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솔~ 바람이 지휘하는 ‘황금 멜로디’
▲ 마치 소의 잔등처럼 유순한 차귀도 해안은 마라도를 닮았다.황금처럼 빛나는 억새로 가득한 차귀도 풍경. | ||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앞바다에 자리한 차귀도가 억새섬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낚시꾼들이나 찾을까, 차귀도는 그저 바다에 떠 있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무인도인 이 섬을 여행지로 삼는 이가 극히 드문 탓이다.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섬 ‘와도’와 함께 밋밋한 바다 풍경에 포인트를 주는 것으로 섬은 임무를 다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배를 타고 차귀도로 들어간다면 섬이 단지 바다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억새꽃을 부단히 피워 올리며 가을을 준비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귀도는 2000년 7월 18일 천연기념물 제422호로 지정된 섬이다. 아열대의 특성을 띠는 수중 동식물들이 다양하게 서식하는 곳으로 특히 5∼10m 수심에 수많은 미세 홍조식물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아직 공식적으로 학계에 발표되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 속 이야기다. 물 위에 드러낸 섬은 그런 동식물의 보고와는 거리가 먼 억새밭이다.
일단 차귀도로 가려면 자구내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자구내포구는 ‘도대불’이라고 부르는 옛날 등대가 한쪽에 서 있고, 방파제를 따라 줄에 걸어놓은 오징어들이 춤을 추는 평화롭고 한적한 포구다. 도대불은 시멘트가 아니라 돌로 쌓아올린 약 3m 높이의 등대로 제주도에는 이런 등대나 그 터가 약 17기 남아 있다.
무인도이다 보니 자구내포구에서 차귀도로 가는 정기선은 당연히 없다. 다만 낚싯배들이 수시로 오간다. 포구에서 섬까지는 고작 5분 거리다. 차귀도는 죽도·지실이섬·화단도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0.16㎢에 불과하다. 죽도가 본섬으로 대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대나무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과거엔 주민들도 살았다고 하지만 현재는 빈 섬이다. 집터와 우물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배에서 내린 후, 섬으로 올라가는 외길을 따라 100m쯤 가면 집터가 있다. 지붕은 모두 바람에 날아가고 벽만 앙상히 남아 있다.
차귀도는 마치 누런 털모자를 쓴 것처럼 전체가 억새로 덮여 있다. 바람이 모질게 부는 이 섬의 억새는 여느 곳과 다르다. 억새들이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 하고, 바람에 쏠려 한쪽으로 누워 있다. 거칠기보다 곱고 부드러운 금발의 머릿결을 연상케 한다. 사람의 온기기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원래 있던 길은 모두 억새에 덮여 버렸지만 누군가 그 숲을 헤치고 나갔는지 반대편 봉우리 쪽으로 가느다랗게 길이 나 있다.
그 길이 끝나는 부분에는 하얀 등대가 오롯이 서 있다. 그러나 빛을 밝히지 못 하는 말하자면 생명을 다한 등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등대지만 섬을 방문한 이방인에게는 바람을 피해 기댈 언덕이 되어 준다.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등대에 기대앉아 있노라면 바람에 실어 보내는 억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 자구내포구에 도대불이라고 불리는 옛날 등대가 아직 남아 있다.(위) 백령도 두무진도 울고 갈 차귀도 해안 절경. | ||
한편 차귀도 가까이에 있는, 억새가 좋은 곳으론 새별오름을 꼽을 수 있다. 1135번 도로를 타고 제주시내 방면으로 가다보면 어음리 못 미쳐 왼쪽에 새별오름이 있다. 들불축제장으로 잘 알려진 오름(기생화산)이다. 제주도에서는 마소 방목을 하기 때문에 묵은 풀들을 태우고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오름에 불을 놓고는 했다. 이를 축제화한 것이 바로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다. 1997년부터 시작된 들불축제는 장소를 해마다 그 장소를 옮겨하다가 2000년 이후 새별오름으로 고정되었다.
새별오름은 특히 억새가 곱기로 유명한 곳이다. 말발굽형 분화구를 가진 새별오름의 사면은 요즘 일렁이는 억새꽃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기슭에서 정상까지 약 20분이면 닿을 정도여서 오름을 오르는 일이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가깝다. 주변에 이달오름, 누운오름, 금오름, 밝은오름, 새미오름 등 고만고만한 오름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서쪽 바다가 펼쳐진다. 정면 협재 쪽으로 비양도가 손에 잡힐 듯 하고, 왼쪽으로는 차귀도 또한 또렷이 보인다. 거기서 조금 더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뾰족하게 솟아난 산방산도 보인다.
새별오름은 특히 해거름을 감상하기 좋다. 해질녘 새별오름에 오르면 하얗던 억새꽃이 황금색으로 물들고, 비양도와 차귀도 사이 바다로 떨어지며 하늘 또한 핏빛처럼 붉게 물들이는 명품 해거름을 볼 수 있다.
사실 제주도는 딱히 억새 명소를 꼽을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곳곳에 억새밭이 널려 있다. 대부분의 오름이 억새로 덮여 있고, 경작지가 아닌 들판을 메우는 것도 다름 아닌 억새다. 오름 중에서는 서쪽에 새별오름이 있다면 동쪽에는 산굼부리가 그 못지않다. 오름 산책로가 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접근도 용이하다. 하지만 잘 알려진 관광지이다보니 호젓함이 없어 다소 아쉽다.
조금 더 동쪽으로 길을 잡는다면 송당과 종달리 접경의 오름들이 좋다. 특히 이 부근의 오름들은 조망이 훌륭하다. 손지오름, 용눈이오름 등도 제법 괜찮지만 다랑쉬오름이나 거미오름에는 미치지 못 한다. 이들 오름에 서면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잡힌다. 서쪽의 새별오름은 해거름 때, 이곳 동쪽의 다랑쉬오름과 거미오름은 해오름 때 찾아 떠나면 좋다. 검게 실루엣으로 잡히는 성산 일출봉 뒤로 불쑥 떠오르며 세상을 모두 태울 듯 기세 좋게 떠오르는 해오름이 일품이다.
이들 오름에 가려면 먼저 송당리를 찾아가야 한다. 산굼부리에서 1112번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15분쯤 가면 송당리가 나온다. 이 마을에서 1136번 도로를 타고 수산리 방향으로 가다가 비자림 방면으로 틀면 다랑쉬오름이 있고, 길을 틀지 않은 채 약 3분 정도 직진하면 오른쪽에 동거미오름이 있다.
들판 중에서는 교래리 삼다수공장 주변 억새꽃이 소문이 났었다. 하지만 요즘은 생수생산에 방해가 된다며 억새를 베어버리는 바람에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수산리 가는 길에서 달래면 된다. 1112번 도로를 타고 송당리 쪽으로 가다보면 대천동사거리를 지나 오른쪽에 수산리 길이 나오는데 억새꽃 들판이 길게 이어진다.
★길잡이: 제주국제공항→1132번 지방도→한림읍→한경면사무소 삼거리→우측 해안도로→풍력발전단지→자구내포구(제2태양호(011-699-7754)와 소망호(016-691-2923)가 섬까지 왕복)
★먹거리: 자구내포구에 싱싱한 활어회를 파는 횟집들이 많다. 또 이곳에는 갈치조림을 잘 하는 만덕식당(064-773-0255)이 있다. 한편 약 15분 거리에 송악산이 있는데 이곳에 성게전복물회라는 별미를 파는 송악산식당(064-794-7711)이 있다.
★잠자리: 자구내포구 바로 인근에 섬풍경리조트(064-772-3651)라는 펜션이 있고 약 5분 거리의 고산리에도 뜰안채(064-773-2312)라는 펜션이 있다. 포구에 민박집들도 많아서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문의: 제주특별자치도 관광문화포털(http://cyber.jeju.go.kr) 064-710-3854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