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지난주에 늙고 나약해진 어머니와 이모님들을 모시고 1박2일 짧은 여행을 했다. 우리 어머니 생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원주에 있는 외할머니에 산소에 들렀더니 외할머니 묘지 앞에서 오랫동안 일어날 줄 모르는 큰이모의 기도소리가 은근히 사무친다.
“엄마, 이제 내가 벌써, 엄마 세상 떠난 나이가 되었네! 나도 이제 갈 때가 되니까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나요. 이제 10년은 못살겠고, 한 4~5년, 이렇게 아름다운 봄을 보고 엄마가 간 세상으로 갈 테니까, 기다리세요.”
콧등이 시큰해지는 이모의 기도소리는 오래 남았다. 운전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이모에게 물었다. 큰이모는 죽음을 생각하고 사시느냐고. “죽을 때가 됐는데 왜 죽음을 생각 안 해? 나이가 들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풀어져 있는 게 보여. 그러면 죽음이 무섭지 않고 세상이 진짜 아름답단다. 이렇게 꽃피는 것만 봐도 좋아!”
우리 이모들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는데 세월이 덧없지 않냐고 하니까 ‘덧없긴, 고맙지’ 하신다. 생이 고맙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분명히 덧없는 세월, 덧없는 세상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늙음의 품, 품위를 보았다. 어떤 젊음이 그 넉넉한 품을 흉내조차 낼 수 있겠는가.
젊음이 열정이라면 늙음은 지혜다. 젊음이 변화라면 늙음은 여유다. 젊음이 도전이라면 늙음은 관조다. 젊음이 준비라면 늙음은 마무리다. 세상에 젊음이 없으면 치열해질 이유도 변화도 없지만, 또 늙음이 없다면 여유도 평화도 없다. 그러니까 젊음과 늙음은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인생의 성격이라기보다, 밤과 낮이 하루의 두 성격인 것처럼 내 삶의 균형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음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상인심 덕분인지 생각보다 우리는 자학에 익숙하다. 빌딩 속, 아파트 속에 갇혀 지내는 우리는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할 일이 없으면 주눅이 든다. 월든 호수가에서 손수 집을 짓고, 밭을 갈아 먹었던 소로우가 말한다. 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할 일은 충분하다고.
소로우를 읽고 있으면 ‘내 속의 늙음’이 깨어나는 것 같다. 그는 영악한 문명에 지치고 세속적인 삶에 환멸을 느낀 친구 신학자 블레이크에게 빛나는 태양 아래서 시야는 넓게, 문제는 단순화시키라고 권한다. “너무 도덕적이 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권유는 고백이다. 느릿느릿 산책하면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던 소로우가 권한다. 삶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그러니 바로 지금, 영혼이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산처럼 묵직하고 물처럼 맑은 소로우의 재능이자 매혹은 욕심을 부리지 않은 거였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무욕한 존재들만이 친구가 되었으며, 욕심으로 어두워지지 않았기에 마음 밖의 자연이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