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메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는 그렇게 버림받아 미친 남자가 주인공이다. “1백30년 동안 백조는 여자였다. 세상 처음으로 남자들만의 백조를 창조한다”는 카피로도 태어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그 파격만큼이나 창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왕자는 사랑하지 않는 여인과 살기보다 사랑하는 여인과 죽기를 원하는 낭만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후에는 연인에게 사랑받기를 갈구했으나 그 사랑에 버림받고 사랑의 꿈을 꾸다 미쳐 죽어가는 인물이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사랑이다. 충분히 충만했어야 할 최초의 그 사랑에 균열이 생기고 상처가 생기면 평생을 안고 간다. 해결되지 못한 사랑으로 거기서 정신적 성장이 멈춘 사람이 의외로 많다. 상처가 깊은 사람은 누군가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다. 그 사람에게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병이다.
이 문제를 파고든 작가는 김형경이었다. 그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 <사람 풍경>에 따르면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의존적인 사람은 엄마처럼 보살펴줄 사람을, 자기애적인 사람은 미화된 자기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인정 중독증인 남편에게는 칭찬 방어기제를 가진 아내가 찰떡궁합이고, 의처증 증세를 보이는 남편은 거짓말쟁이 아내와 궁합이 맞다. 독재자형 남편에게는 순종적인 아내가 찰떡 궁합이다. 사실 그 ‘찰떡 궁합’은 병이다. 그러니 사랑을 선택하는 ‘나’의 특별한 기준은 사랑을 선택하는 내 무의식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병적인 기준인 것이다.
스캇 펙에 따르면 생의 모든 문제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니, 생에 문제가 있으면 사랑에도 문제가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열정에 도취하여 혹은 이별의 슬픔에 애간장이 녹아 자기만의 병적인 기준으로 사랑을 선택하는 그 ‘나’를 자각하지 못하면 김형경이 표현하듯 ‘사랑할 때 내면에서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면으로 끌어안을 수 없다.’ 당연히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이 반복될 뿐이다.
사랑할 때는 전 인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연히 사랑할수록 감정의 격랑을 타고 덮쳐오는 부정적인 감정들도 있다. 예컨대, 질투라든가, 우울이라든가, 자기비하라든가, 분노라든가 하는 내 생의 복병들은 사랑 앞이라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외면하려 할수록 기승을 부린다.
그렇다면 어찌하나? 그런 감정들은 자각과 함께 수용되어야만 한다. 자각이야말로 자기존중의 기본이니까.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사랑은 콤플렉스가 없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를 자각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틱낫한은 식물은 햇빛에 민감하듯이 모든 정신적 작용은 자각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고 했다. 침착하게 호흡을 하면서 자신 안에서 일어나 들끓고 있는 분노와 절망, 슬픔과 불안을 들여다보라! 변화는 그 자각 속에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