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허공’을 온전히 소화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고, 그 노래를 완전히 밀어내기에는 뭔지 모를 매혹에 기웃거렸다. 어정쩡하게 귀에 익은 그 노래는 실연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 노래가 되었다. 잊어야 할 그 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 날들은 얼마나 진지하고 슬펐던지.
노래는 추억을 불러내는 힘이 있다. ‘허공’을 부르고, ‘친구여’를 부르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는 조용필씨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한순간 나를 나이 들게 했던 그때 그 청춘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열정적으로가 아니라 아련하고 비릿하게. 그건 그리움이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미 보내버린 청춘도 나쁘지 않구나! 더 이상 기대가 없는 사랑도 추억의 화덕에서는 따뜻하게 구어지는구나! 이제 나는 그리움을 품고도 객기를 부리지 않을 만큼은 나이 들었구나!
평양 시민들과 호응하는 조용필씨를 보면서 나는 내 20대를 조우했던 것이다. 그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는 ‘Q’였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열정의 끝을 볼 정도로 간곡한 사랑, 나락으로 구르는 걸 막을 수 없었던 절박한 사랑! 그 때 우리의 청춘은 그런 거였다. 하늘에는 태양도 하나, 내 마음엔 님도 하나라고.
그런데 그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영원한 사랑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과 고통을 보장한다는 것을 지적한 이가 있었다. 스캇 펙이었다. 그가 쓴 <아직도 가야할 길>에 따르면 당신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은 그 고백이 절박할수록 사랑의 생활이 아니라 기생충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함께 살 것을 노력하는 것이다. 사랑을 받는 일이 생의 목적인 사람들은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단다. 사랑을 받고자 노력하는 이가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의 동기가 ‘집착’이어서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자유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스토커처럼 따라 다닐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능력에서 온다. 불안정한 생 속에서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 싫고 무엇이 좋은 지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들을 줄 알며, 상대의 말에 진정으로 귀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느낌으로 행동하는 것을 때때로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스캇 펙이 말한다. 정열은 거대한 심층적 느낌이지 제어되지 않은 감정이 아니라고.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를 따라 부르면 생각한다. 사랑도 생로병사를 거친다고. 충분히 사랑 받아야 할 때가 있고,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할 때가 있다고. 또 사랑마저도 초탈해야 하는 때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