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교수 | ||
1992년쯤인가 <뉴스위크>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남쪽 인터스테이트 5번 고속도로에 등장한 이색 도로표지판을 소개한 적이 있다. ‘주의!’라는 문구 아래 어른 두 사람이 앞장서 달리고 그 뒤를 한 어린이가 따르는 모습을 실루엣으로 그린 표지판이었다. 6차선 도로를 쏜살같이 건너는 멕시코 불법입국자를 조심하라는 경고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멕시코 쪽에서 들어오는 불법 입국자 때문에 골치를 앓아오던 미국은 이른바 ‘게이트 키퍼 작전’을 펴 국경선에 높이 2.4~3.6m의 장벽을 세우기도 했지만 ‘물샐틈’없이 막아 내지는 못한 모양이다. 미국이 더욱 긴장하는 것은 지난 2002년을 기점으로 히스패닉계가 흑인 인구를 추월했기 때문이다. 히스패닉 인구가 3천7백만 명으로 흑인의 3천6백60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렇게 되자 지난 12월16일 미국하원은 국경장벽 설치를 골자로 한 불법이민 차단법안을 통과시켰다. 멕시코와의 국경선(총 3천2백km)에 2조2천억원을 들여 1천1백30km에 이르는 높이 3m의 이중장벽을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불법이민을 차단하기 위해 한 국가의 예산 규모에 이르는 돈을 들여 현대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한다. 동서 냉전시절 양 진영간에 놓였던 ‘철의 장막’은 이념의 장벽이었지만 미국과 멕시코 국경선의 장벽은 사람을 막는 장벽이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설사 불법 입국자의 자식이라도 미국 국적을 주던 이른바 속지(屬地)주의 국적법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경선을 쌓겠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좀 산다하는 집안의 며느리들이 만삭의 배를 안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것도 그 속지주의 국적법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지주의가 폐기되면 ‘원정출산’도 무의미하게 되고 외국인이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는 `낙타가‘바늘구멍 통과하기’가 될 모양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미국은 전 지구인들이 동경하는 꿈의 세계였고 개척자를 불러 들이는 ‘놀라운 신세계’였다. 그리고 오늘의 미국은 건설한 사람들은 세계 각국에서 건너 온 이민자들이었다. 그런 미국이 바깥세계와의 장벽을 자꾸 높이는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건국정신과도 어긋나는 일이다. 20세기초 유럽에서 들어오던 이민들은 오랜 항해끝에 뉴욕항에 입항하면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벅찬 감동을 맛보곤 했다. 그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 내게로 오라/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 사람들/혼잡한 삶의 해안에 쓰러진 불쌍한 사람들/머무를 곳 없이 폭풍에 시달린 사람은 내게로 오라/나는 황금빛 문옆에 서서 등불을 들리라.”
이광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