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거일 소설가 | ||
그러나 기득권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 있다. 바로 믿음이다. 누구도 재산 대신 목숨을 내놓지 않지만, 믿음을 위해 목숨을 선뜻 바치는 순교자들과 자살 테러리스트들은 많다.
그래서 영국 경제학자 케인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학자들의 낡은 주장들이라고 말했다. 케인즈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3년 반 동안 실감했다. 우리 경제 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죽은 경제학자’는 19세기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다. 조지는 민중주의적 이론으로 한때 인기가 높았으나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현 정권이 들어선 뒤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정책 보좌관이 조지의 영향을 뚜렷이 받은 정책들을 내놓았고 현 정권은 줄곧 그것들을 시행했다.
이런 사정은 참으로 이상하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과학이 워낙 빠르게 발전했으므로 19세기의 과학 이론들은 모두 ‘원시적’ 이론들이 되었고, 당시에 옳다고 여겨진 지식들은 대부분 그르거나 부정확한 것들이 되었다. 경제학도 물론 마찬가지여서 19세기의 경제학 이론들은 옳은 경우에도 지금 그대로 쓰기엔 너무 원시적이다. 조지의 이론들 가운데 옳은 것들은 이미 주류 경제학에 흡수되었고 그른 것들은 폐기되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새삼스럽게 그를 들먹일 이유가 없다. 경제학사나 지식사회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을 빼놓으면 조지는 흥미로운 인물이 못 된다.
나라의 경제 정책의 틀을 짜는 대통령 보좌관이 조지처럼 잊혀진 경제학자의 이론들을 원용하는 일은 사리에 어긋난다. 그렇게 특정 인물의 지적 취향에 좌우되기엔 나라의 경제 정책은 너무 중대하다. 설령 조지가 훌륭한 경제학자였다 하더라도 그렇다. 경제 정책을 맡은 사람은 주류 경제학 이론을 따라 경제 정책을 짜야 온당하다. 다양한 이론들의 경쟁을 통해서 다듬어진 주류 경제학 이론이 현재로선 가장 진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정 경제학자의 소수 이론에 끌리는 자신의 취향을 ‘소신’으로 내세우면서 우리 경제가 불필요한 위험을 지도록 할 도덕적, 실제적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불행하게도, 조지의 경제 이론들은 거의 다 틀렸다. 그런 이론들을 바탕으로 삼아 그는 토지의 지대를 실질적으로 몰수하는 세금만으로 나라를 꾸려나가자는 ‘단일세(Single Tax)’를 주장했다.
그는 가난의 근원이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토지 소유자가 토지 가치의 상승에서 보는 이익을 정부가 세금으로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세기 미국에서도 조지의 단일세 주장은 이론적으로 허술하고 너무 비현실적이서 경제학자들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에서 갑자기 그의 주장이 되살아난 것이다. 부동산 소유자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 재산권에 대한 줄기찬 공격,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몰수적 과세와 같은 현 정권의 경제 정책은 토지 사유에 적대적이었던 조지의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 경제가 이리 비참하게 된 까닭은 물론 여럿일 터이다. 그러나 한 세기 이전에 죽은 경제학자가 느닷없이 살아나서 우리 경제 정책을 좌우했다는 사실도 분명히 한몫을 했다. 실은 그런 ‘느닷없음’은 현 정권의 다른 분야들에서도 우리가 자주 보아온 특질이었다. 우리 사회가 보다 안정적으로 움직이려면 우리 모두가, 특히 현 정권이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복거일 경력
소설가, 경제 평론가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비명(碑銘)을 찾아서>, <보이지 않는 손> 등의 장편 소설과 <현실과 지향>,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등의 사회평론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