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모비스 울산공장을 방문한 정의선 부사장 (맨 오른쪽)이 관계자로부터 모듈라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오른쪽은 스포츠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정 부사장이 기아야구단을 찾아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 ||
지난 2002년 현대자동차는 월드랠리(WRC:World Rally Championship) 에서 종합 4위를 기록해 세계 자동차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랠리 참가 3년 만에 거둔 성과였다. 당시 이 랠리에 참가한 차종은 현대자동차가 직접 개발, 생산한 베르나 월드랠리카였다.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경쟁업체들은 앞다퉈 요인분석에 나섰다. 분석 결과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차량 품질력과 기술력, 그리고 베테랑 드라이버 기용 등이 꼽혔다. 이와 함께 눈길을 끈 것은 정의선 부사장 등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원이 개가를 올린 또다른 요인으로 지적됐다는 점이었다.
스포츠에 대한 정 부사장의 관심은 유별나다. 모터스포츠뿐 아니라 축구, 농구, 야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같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마케팅에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정 부사장은 한동안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닌 적이 있다. 청운동 근처 체육관에서 동창들과 농구경기를 하던 중 리바운드 볼을 잡으려고 점프하다 그만 친구와 다리가 엉켜버린 것. 한동안 고생을 했지만, 다리가 낫자마자 곧바로 농구장이나 테니스장을 찾았다. 그에게 운동은 생활의 일부처럼 되어버렸다.
학창시절 정 부사장은 수학과 역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의 틀을 습득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리고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을 예측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면에서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심은 현재 회사경영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소한 2∼3년 후를 늘 생각하고, 시대흐름에 맞춰 경영의 방향을 모색하고 제시해야 하는 경영인에게 필요한 기본소양은 논리력와 역사적 간접경험이라고 말한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 부사장의 학창시절 모습은 조용하고 과묵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지금도 남 앞에 나서서 떠드는 것보다는 남의 말을 주로 듣는 편에 속한다.
고교 시절 친구들이 전하는 정 부사장에 대한 기억은 ‘아량이 넓은 친구’였다. 정 부사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산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나중에 집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구정중학교로 전학을 가 졸업했다. 오산중학교 때의 일이다. 당시 그가 다니던 오산중학교는 한 반 60명중 절반에 가까운 30명 정도가 생활보호대상자일 정도로 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양친이 안 계시거나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어려운 학생도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 부사장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한동안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정 부사장의 이런 행동에 가족들이 불편해했을 법도 하지만 부친(정몽구 회장)이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다. 정몽구 회장은 평소 아들의 이런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 부사장의 집에서 함께 먹고 자며 학교를 다닌 친구 중에는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다. 지금도 이들 친구와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 때문인지 지금도 정 부사장 주변에는 친한 친구, 선배들이 많다.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최태원 (주)SK회장, 이웅렬 코오롱 회장, 터보텍의 장흥순 회장 등도 친한 부류에 속한다. 물론 친구들 중에는 재벌가 자제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평범한 샐러리맨 친구도 많다.
친구들과는 시간이 없어 만나기 힘들면 짬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 서로 안부를 묻거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정 부사장은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인생의 동반자로서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정 부사장의 고교 시절 단짝 친구가 전한 얘기. “정 부사장은 휘문고 재학 시절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많은 친구였습니다. 공부도 잘했지만 테니스, 수영, 스키 등 운동에 소질이 많았고, 특히 클라리넷을 잘 불었어요. 교내 음악서클에 가입해 합주도 몇번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 부사장은 의리가 강하고, 리더십이 뛰어나 주위에 늘 친구가 북적댔어요. 저도 정 부사장의 집에서 시험공부도 하고, 농구도 같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정 부사장이 정주영 회장님의 손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 투스카니 출시 기념 레이싱 행사 때 정 부사장은 직접 차에 몸을 싣기도. | ||
오랫동안 짝으로 지내긴 했지만 정 부사장은 그런 사실을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거든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앞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참 괜찮은 친구다’ 하고 생각한 정도였어요.”
정 부사장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인 정주영 회장과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부인과 아들딸(1남1녀)이다. 특히 그의 아내 사랑은 신세대 가장답게 유별나다. 정 부사장의 부인은 INI스틸(옛 인천제철)과 합병한 강원산업 정도원 회장의 장녀 정지선씨다.
두 사람은 지난 1995년 결혼해 올해로 결혼 8주년이 됐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지선씨는 정 부사장의 친구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두 사람의 연애 기간은 20년 가까이 된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교제를 가진 것은 정 부사장이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때에 지선씨도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오면서부터였다.
지선씨가 미국에 온 걸 안 정 부사장이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잘 알고 지내던 터라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졌다. 그 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었다. 본관은 달랐지만, 같은 성(姓)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정 부사장은 이러한 문제가 좀 걸리긴 했지만 집안 어른이자 할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지선씨를 인사시켰다. 지선씨를 찬찬히 살펴보던 정 명예회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동 정씨(정의선 부사장)와 김포 정씨(정지선씨)는 본이 다르니 혼사를 시켜도 괜찮다.” 뿐만 아니라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 자리에서 지선씨의 집에 전화를 걸어 일주일 후 약혼 날짜를 받아내는 등 적극적으로 정 부사장의 결혼에 나섰다.
평소 무슨 일이든 결정을 내리면 강하게 밀어붙이던 정 명예회장의 추진력이 장손의 결혼날짜를 받아내는 데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정 부사장이 지선씨를 인생의 반려자로 맞게 된 것은 착하고 바른 그녀의 마음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똑똑한 여자보다 지혜로운 여자’를 동경하던 정 부사장에게 지선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었던 셈이다. 정 부사장은 평소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바로 퇴근해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낸다. 주말에도 가급적 다른 약속을 자제하고 가족들과 야외로 나가 자연을 즐기기도 한다. 가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든든한 조직”이다.
현대자동차 직원들은 정 부사장으로부터 가끔 뜻하지 않는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영화나 연극 티켓이 그것이다. 정 부사장이 직접 구입해서 직원들에게 선물하는 것들이다. 정 부사장은 평소에도 직원들과 회식을 겸한 공연관람을 즐긴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직원들이라도 좋은 영화나 공연을 보면서 정서적인 여유를 가지도록 이런 방법으로 배려한다.
공연티켓은 가끔 그의 부인이나 어머니에게도 전달된다.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은 주부인 만큼 적당한 문화생활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여유있고 풍요로운 정서가 생활에 활력이 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그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바른 생각의 유지다. 땀을 많이 흘리는 것 못지 않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건강한 마음과 몸을 만드는 기본이 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다.
1993년 고려대를 졸업한 정 부사장은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MBA과정을 마쳤다. 그 후 뉴욕에 소재하고 있는 일본계 기업인 이토추상사에서 2년간 근무하며 미국과 일본의 문화를 함께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 유학기간 동안 정 부사장은 전공 과목인 경영학 외에도 기업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덕목을 많이 배웠다.
그 중 하나가 ‘직원간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직원 상하간 열려 있는 사고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대화를 하는 그들의 문화는 최단시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이루어내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곧바로 기업의 경쟁력과 연결된다고 판단했다. 정 부사장은 어려서부터 자동차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유학기간 동안에도 가능한 한 많은 수입차를 접하며 그들과 현대차를 비교하고 분석했다. 일상생활에서 차를 이용하는 것 외에도 대학시절부터 직접 짐카나(경주용이 아닌 일반차량 경주종목) 경기에 참가할 정도로 자동차에 애착을 보였다. 가끔 입장료를 내고 일반인도 스피드를 체험할 수 있는 투어링카를 시승할 정도였다.
정 부사장은 해외 유명 자동차를 접하면서 품질이나 성능면에서 우리차도 충분히 세계로 진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그랬고, 정몽구 회장이 그랬듯이, 정 부사장도 회사내에서 ‘일벌레’로 통한다. 그는 매일 아침 6시30분이면 어김없이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에겐 따로 정해진 보고시간이나 회의시간이 없다. 그는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시간을 엄격히 정해놓고, 그것의 구속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회사에서는 일의 진행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급한 일이라면 별도의 보고시간을 마련하기보다는 바로바로 얘기하고, 즉석에서 결재를 받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다.
업무의 융통성,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그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기업 환경이다. 그런 점은 현재 그가 참여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차세대위원회’ 운영에서도 잘 나타난다. 차세대 위원회는 현대자동차 내에 과, 차장급 실무진으로 구성된 일종의 ‘주니어 보드’와 같은 성격의 모임이다.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회사 운영에 관한 실질적인 의견을 교환하는 임직원 커뮤니케이션의 장이다. 모임에서 논의된 내용은 최종적으로 사장의 결재를 얻어 실무에 반영된다. 정 부사장이 이런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회사의 젊은 생각을 직접 듣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젊은 생각’이란 단순히 물리적으로 나이가 젊은 직원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야말로 변화를 주도하는 ‘유연한 사고’를 말한다. 물리적 나이는 50대, 60대라도 생각이 젊고 유연하다면 오히려 풍부한 연륜과 경험은 기업경영의 훌륭한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유로운 사고와 적절한 경험, 거기에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결합된다면 훌륭한 아이디어와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창출될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이 모임에 직접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