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련 회의장에서의 정주영 | ||
정주영은 이 전경련의 최장수 회장. 77년 2월, 김용완 회장(경방)에 이어 제6대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된 이후 1987년 2월까지 10년 동안 5선을 연임했다. 따라서 전경련 수장으로서, 그의 족적은 재벌과 권력의 역학관계에 대한 굴곡과 교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만의 특수한 ‘재벌경제’ 현실에서 재벌과 국익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가야 할 것인지, 그 방책에 대한 근본 물음도 던지게 한다. 오늘의 시점에서 되새길 만한, 실제 흐름을 잡아본다.
“전경련 회장은 전경련 회원들이 뽑는 것이지 권력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전두환 정권의 발족 초기인 5공 신군부 시절, ‘권력’으로부터 강제 퇴임압력을 받은 후 정주영이 이를 거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권력핵심을 향해 터트린 말. 전경련은 이 말을 신호탄으로 오히려 신군부에 저항하듯 정씨를 만장일치로 재추대, 지금껏 전경련의 위상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이 일을 거론한다. 역대 권력들의 끝없는 ‘칼자루 공격’ 속에서 재벌과 전경련이 국가 사회적 주도권과 기득권을 놓고 그 공방에 골몰해온, 부침의 현대사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다음은 그때부터 내세워온 정 회장의 ‘방어논리’. 전경련의 위상확보를 위한 것이었지만, 기업인으로서 여전히 유효한, 권력과 정부에 대한 기본 입장으로 보여진다.
“나는 전경련 회장 재임중 재계를 좌지우지해보려는 권력의 힘에서 재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호하고 관철하려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시대는 작은 정부와 경쟁에 의한 자유 시장 원칙의 자유 기업주의를 요구하고 있는데도, 정계와 경제 관료들은 시대에 역행해서 오히려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와 간섭을 계속 강화하려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위에 안맞으면 대기업을 하루아침에 공중분해시키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무서운 힘의 행사에도 관계없이 기회 있을 때마다 경제 관료, 경제학자, 정치인 등에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자유 기업주의가 아니면 안된다는 소신을 피력하곤 했다. 경제 관료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을 때도 나는 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줄이고 기업의 창의와 자유를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부실 기업은 정치 금융과 관치 금융이 낳는 것이라는 지적을 수차 했다.”
여기에서 그는 한발 더 나아간다. 정부권력과 시민단체, 노조 등 일각에서 통상적으로 제기되어온 ‘재벌횡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반 기업주의 풍조’란 용어까지 동원, 거침없이 항변했다. 이 또한 우리사회가 안고 있었던 노·사·정 관계의 갈등구조를 함축하고 있는 부문.
“기업(재벌)이 무슨 수든, 이윤만 추구하려 한다는 드센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기업가의 첫째가는 목표는 이윤을 낳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다, 기업이 낸 이윤이 세금으로 정부에 들어가고, 이것으로 사회 복지도 확장하고 분배 정책도 펴고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따라서 기업 이윤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라는 주장은 기업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작은 기업을 일으켜서 중소기업이 되고 중소기업이 커서 대기업이 되는 것이고 대기업이 더 발전해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야만, 그것이 바로 국민 경제의 발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업이 세계 수준으로 자꾸 커져야만 정부는 이 발전을 토대로 사회 복지와 분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자기 기업을 키우는 것이 기업 본연의 역할이지, 기업으로 발생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시시때때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반 기업주의 풍조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주영은 그때부터 대기업(재벌기업)이 진정한 ‘국익’을 위한 설자리가 ‘세계적 수준의 성장’에 있다는 견해에 확실한 무게를 싣고 있었던 셈. 재벌의 사회적 부작용의 극복은 그 다음 내부 문제일 뿐이란 ‘확대팽창전략 일변도’의 시각이 강하게 엿보인다.
그러나, 그후 정작 나타나고 있는 한국 재계의 냉정한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비판. 심지어 현재 한국 재벌기업의 실태는 ‘자본주의의 원리 및 기반의 위협과 근본적 재검토’로 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
고려대 강수돌 교수(경제학)의 비평을 들어본다.
▲ 1982년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의 정주영 회장(맨오른쪽). 정 회장은 5공 초기 신군부부터 전경련 회장 강제퇴임 압 력을 받았다고 한다. | ||
따라서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외국언론의 비난에 대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듯’한다거나 제법 그럴듯한 개혁안을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고급 코미디를 할 것이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 부정과 비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토대 자체를 혁파함으로써 문제의 근본에 다가서도록 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경제와 경영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근본 원인 해명 및 그 해결책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책임성 있게 이어지길 고대한다.”
최고의 현안은 역시 재벌기업의 구조조정 문제. 이 문제에 대한 경제평론가 김동원씨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그는 재벌기업의 해외매각 문제를 비롯한 구조조정과 국익, 그리고 공적자금 문제에 관해 비교적 선명한 분석을 내린다.
“부실 대기업을 해외에 매각하자니 헐값으로 팔았다는 여론의 비판이 두렵고, 그대로 두어서는 구조조정이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스스로 헐값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의 잠재매수자를 처음에는 부실기업을 처리해 주는 ‘산타클로스’로 시작해서 우리 식의 계산방식과 맞지 않으면 ‘샤일록’으로 몰아 가는 여론중심의 해외매각 행태를 개선하지 않는 한, 한국의 매물은 국제시장에서 ‘불신의 왕따’가 될 수밖에 없다.
국익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헐값 시비가 아니라 국제 시장으로부터 한국에서 기업이나 금융을 하고 싶을 만큼 사업여건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온 국가사회가 함께 노력하는 풍토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국재벌의 세계적 신인도 회복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이병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