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서울올림픽 개막식 | ||
특히 88올림픽 유치와 관련, 정주영은 “88올림픽 유치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던 박 대통령은 당초 이 행사를 통해 우리 나라의 경제 발전과 국력의 과시, 공산권 및 비동맹 국가와의 외교 관계 수립으로 분단 상황 극복 여건을 조성, 우리경제의 국제경쟁력을 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데 활용하려 했다.
그 유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논의는 박 대통령 시대 말기쯤부터 있었고, 제24회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겠다는 정부 방침 발표도 79년 박 대통령이 직접 했다. 잘만 하면 개발 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디딤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과연 그 실제결과는 어떠했나.
우선, 문제는 박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으로부터 꼬여들게 된다. ‘올림픽 유치’를 선언한 같은 해 10월 박 대통령이 불행한 죽음을 당하고, 군부의 권력 다툼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긴장과 불안 속에 1980년도를 맞았던 것. 전두환 정부가 올림픽 유치 의사를 정식으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신청, 통보한 것은 상당한 시한이 흐른 80년도 12월. 다음해인 1981년 3월에 NOC(각국올림픽위원회), IOC, GAISF(국제경기연맹) 조사단이 와서 개최 여건 조사를 비로소 하고 가게 된다.
그러나, 그때부터 본격적 내부진통은 벌어진다. 우선 내각총수인 남덕우 총리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 처음부터 ‘계산이 서질 않는 일’이라는 것이 남 총리의 완고한 입장. 당시 관련 인사의 자세한 회고다. “상황이 매우 고약스러워졌다. 올림픽 관련 주무 부서인 문교부 체육국이 당시 총리에게 유치 활동에 소요되는 예산 및 제반 사항을 상신했다가 올림픽 망국론자였던 남 총리에게 일축당해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거국적인 유치 활동을 벌여도 일본을 제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뭐가 잘못돼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올림픽 때문에 경제 파탄에 빠져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남덕우 당시 총리의 지론이었다. 총리의 인식이 그러니까 국무위원들도 비슷한 자세들이었다.”
당시 한국의 김택수 IOC(국제올림픽위)위원 조차도 마찬가지 견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소식통은 “김 위원이 ‘우리가 나가서 세계 IOC 위원 82표에서 몇 표나 얻을 수 있겠는가? 대만 표 하나에 미국 표도 둘 중에 하나는 캐나다 동계 올림픽 유치에 쓰여질 것이니 기껏해야 우리 표까지 합쳐 서너 표일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고 전했다.
당시 국제외교정세에서 초강국 일본의 나고야를 이기고 외교력이 미숙하기 이를데 없는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해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가 관계인사들 사이에 팽배하고 있었던 것. 따라서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정 회장과 함께 유치주역을 맡았던 또다른 관계 소식통은 당시 상황과 관련,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접수해서 조사단이 개최 여건 조사까지 마쳤고, 더구나 올림픽 개최 추진 의지 재확인까지 받은 상황에서 돌연 올림픽 유치 신청 철회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밀고 나갈 수도 없었다. 나고야와의 표 대결에서 정말 서너 표를 얻고 마는 망신으로 끝난다면 그 창피는 어쩔 것이며, 소나기같이 퍼부어질 비난을 어쩔 것인가. 상황과 분위기상, 올림픽 유치 업무 수임에 따른 책임이 두려워 모두 의도적으로 올림픽 유치와 관련되는 것을 기피했다. 심지어는 올림픽 개최 신청 당사자인 서울시장까지도 수수방관하는 지경이었고, 주무 부처로 지정됐던 문교부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꿍꿍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 81년 10월 노태우 정무장관이 올림픽 유치권을 따고 귀국하는 올림픽 유치단을 격려하고 있다. [82보도사진연감] | ||
내용인즉슨, 나고야와의 표 대결에서 정부가 당할 망신을 민간인이 대신 당하게 하자는 발상으로, 유치 관할 시장이 아닌 민간 경제인이 유치추진위원장을 맡도록 했다는 얘기였다. 내가 그때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 경제인들 단체장으로서 망신 대용품으로 뽑혔던 것이다. 올림픽 유치 관계 장관 회의에서 이규호 문교부장관의 제안으로 결정된 일이라고 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망신을 당해도 정주영이 네가 당해라’는 정부의 의도였다는 것이 지금도 변함없는 내 생각이다.” 문제는 사전 계산서.
다시 정 회장의 말이다. “당시 우리 나라 형편에 8천억원이라는 경비가 소요되는 올림픽 개최는 사실 부담스러운 액수였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캐나다 몬트리올이 그전 올림픽을 10억 달러라는 막대한 적자로 끝냈던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모든 일은 인간이 계획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적자가 나게 계획하면 적자가 나고, 망하게 계획하면 망하는 법이다.
유치 못하는 것이 바보지, 유치만 한다면 우리 형편에 맞춰 적자 안나게 계획해서 얼마든지 치러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유치작전에 뛰어들었다. 모두들 회의적이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투혼이라 생각하고, 벌거벗는 마음으로 한 번 다시 총대를 메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KOREA 브랜드’의 국제적 신인도를 이 행사를 통해 선진국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던 당초의 목표는 과연 실현되었는가.
전문가 ‘결산’을 들어보자. 함재봉 교수(연세대)는 극심한 정치갈등 등 국내 내적인 문제들이 ‘올림픽 과실물’을 일거에 희석시켰다고 비판하면서, 2002월드컵도 이 같은 우를 다시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경고론’을 펼친다. “올림픽 때 개최 때 우리 국민은 분명 곧 1등 국가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후 곧바로 벌어진 5공 청문회, 끊임없는 노동쟁의와 여야간의 한없는 정쟁이 올림픽에서 얻은 감동과 자신감, 일체감을 한 순간에 파괴해 버렸다. 국가 경쟁력은 땅에 떨어졌고 원칙을 저버린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월드컵을 치른 지금도 똑같다. 이제 ‘대~한민국’의 벅찬 함성은 대답 없는 메아리로 변해버렸다. 인사청문회와 이른바 ‘병풍’의 회오리 속에서 하나 됐던 국민은 분열되고 있고, 전세계를 감동시켰던 열기는 식어 가고 있다. 일류 국가로의 도약은 또 한번 일장춘몽이 돼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월드컵을 통해 새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생각들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엄청난 감동과 성공이, 자신감과 전세계의 찬사가 우리의 정치와 국가경쟁력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과연 이제 무엇으로 우리 대한민국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함 교수의 결론은 88올림픽때나 지금의 ‘월드컵’이나 한마디로 ‘잘못된 국내 정쟁들’이, 한반도가 생긴 후 최초의 세계규모 행사라는 이들 양대행사를 국가경쟁력 강화로 연결시키는데 거꾸로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외치(外治)에 성공하려면, 내치(內治)부터 잘해야 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올림픽의 역사’는 그렇게 일깨우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