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1월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 출발부터 선두를 유지하고 있던 필자는 35km 지점을 통과하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이대로 쓰러져 죽고 싶어!”
상체는 나름대로 열심히 팔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하체는 상체와 멀찌감치 떨어져 뒤따라오고 있었다. 체력이 소진되면서 육체의 세계가 정신세계까지 침범하여 무척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큰소리로 울고 싶고, 악을 쓰며 비명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신음 소리조차 낼 힘이 없었다. 마침내 필자는 1위 시상대에 올랐다. 하지만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이기고 나서 올라선 1위 시상대는 상상했던 것보다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저 고통이 끝났고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기뻤다.
필자는 1988년 달리기에 입문했다. 입문한 지 1년여 만에 많은 대회를 통해 장거리 종목에서 대회신기록으로 우승하였고 곧 장거리 국가대표로 뛰었다. 그렇게 원하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달렸지만 달리기는 전혀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이후 마라톤 종목으로 발전해 마라톤대회에서도 이름을 알리며 역시 마라톤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하지만 마라톤은 즐거움은커녕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는 운동이었다.
마라톤! 때로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고통이 오고 온몸의 뼈와 살들이 부서지고 찢겨지는 아픔이 온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마라톤을 뛸 때마다 항상 엄습해 오지만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냉혹한 고행을 참고 정신적인 압박도 견뎌내려 노력한다. 참고 견디는 순간 “나는 왜 달리는가?” “이대로 쓰러져 죽고 싶어!”라는 회의와 유혹에 감정들이 엉겨 붙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차라리 즐기자.” 결국 많은 경험을 통해 조금씩 고통을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마라톤에 임하는 자세를 바꾼 뒤 1997년 동아마라톤 대회의 우승은 무척 감동적이고 행복했다.
마라톤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온몸으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순간. 마라톤을 즐기면서 삶도 많이 바뀌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생기게 되고 고통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생활 전체에 활기가 넘친다.
처음으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던 기억을 생각하면서 항상 즐겁게 달리길 바란다. 그리고 아직 달리지 않는 분들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달려 보자.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남다른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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