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만든 손유형씨 구명전단. | ||
분단조국을 바다 건너에 두고 사는 재일 한국인. 그들의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착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한반도 안의 남북대결은 일본땅의 ‘민단’과 ‘조총련’으로까지 번져 갈등의 벽을 쌓았다.
그런 정치색이나 무슨 사상·이념으로도 막을 수 없는 동족의 정은 법으로도 끊을 수가 없는 것.
일본 땅에서 동포끼리 얽혀 살면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을 반공·친공의 2분법으로 갈라서, 모처럼 벅차는 심정으로 조국 땅을 밟은 동족을 감옥에 가두어 놓던 지난날의 재일동포구속사건들. 이번에 소개하는 홍성인씨와 손유형씨의 사건에서 불행한 ‘역사의 덫’을 다시 살펴본다.
전국체육대회 재일동포선수단 감독으로 1963년에 이어 1964년 10월 모국 땅을 밟은 홍성인씨, 그가 뜻밖에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소식은 재일동포사회에서 충격과 놀라움으로 번져나갔다. 오사카(大阪)에서 살고 있는 홍씨는 동포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민단(한국거류민단-한국계)의 청년단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인데, 대한태수도협회 사범으로 다년간 활약하였고, 한국의 태권도선수단을 일본에 초청, 국위를 떨치게 함으로써 국내 각계로부터 감사장이나 표창장을 받았다. 뿐인가. 재일동포 북송(北送)저지투쟁과 한일회담촉진운동에 앞장서 실력투쟁까지 함으로써 반조총련 투쟁에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이 남한에 와서 공로훈장 대신 수갑을 차게 되었다니, 그 내막이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혐의 내용은 홍씨가 일본에 사는 친지 오용범씨의 부탁을 받고 서울에 사는 그의 친동생인 오용수씨에게 전언(傳言)을 한 것이 반공법상의 ‘편의제공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말 심부름이 곧 범죄라는 것.
홍씨는 같은 오사카에 사는 오용수라는 사람과 동향 출신이라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63년 10월1일 오씨는 홍씨에게 전국체전 재일동포선수단 감독으로 서울에 가게 되면 동대문구 전농동에 사는 자기 친동생을 만나 안부를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홍씨는 다음날 선수단을 이끌고 귀국, 전주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가했다. 대회가 끝난 뒤 서울 전농동에 사는 오씨의 동생 오용수씨를 찾아가 오씨가 부탁한 대로 “부산으로 이사하거든 곧 편지하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말 심부름 하나가 엄청난 반국가 용공행위로 몰려 구속사태까지 불렀다.
검찰의 주장은 이러했다.
오용수는 1965년 3월 제주고등학교 선배 한 사람의 주선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자로서 조총련 오사카지부 간부로 있는 사람인데, 홍씨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 말 심부름을 하여 편의 제공을 하였다는 것. “부산으로 이사하거든 편지하라”는 전갈 내용도 “부산에 이동하여 거소를 정한 후 편지로서 통지하라”는 지시였다는 것이다.
다음해인 1964년 전국체전 참가차 다시 귀국했을 때에도 홍씨는 일본에 사는 양아무개의 부탁대로 오용수씨를 만났다. 인천여고에서 열린 재일교포선수단 환영회에 참석중인 홍씨에게 주최측 안내원이 누군가 면회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가 보았더니, 바로 오용수씨가 와 있었다. 이때 홍씨가 오씨에게 전한 말은 공소장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홍씨는)… 양(梁) 명불상(名不詳)을 상면, 동인으로부터 북괴 선전을 청문 교양 받은 후, 만약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귀국할 시 오용수가 찾아갈 터이니 필히 동인을 만날 것이며, 그리고 동인에게 지정한 장소로 빨리 나와 대기하라는 말을 전하라는 등 지시를 받자… 동 오용수를 상면하고 동인에게 전시 양 명불상의 지시사항을 전달하여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홍씨는 양아무개에게서 친북교양을 받았다던가 무슨 지시사항을 받고 전달했다는 따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사실, 이런 정도의 안부 전갈을 사건화하는 것은 재일동포사회의 실정과 애로를 도외시한 억지였다.
물론 1960년대 전반기만 해도 일본 내에서 좌우대결 즉 남한을 지지하는 한국거류민단(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조선인총련맹(조총련) 간의 대립은 심각했다. 그러나 한 지역, 한 마을, 앞뒷집에 사는 동포에게 민단과 조총련으로 소속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접촉과 교분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조총련 사람을 만난 것을 두고 곧 용공이나 불온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적화사업’이었다.
또한 지금부터 40년 전인 60년대만 해도 한일간의 왕래나 통화가 그리 수월치는 않았다. 그런 현실이고 보면 입국이 허용되지 않는 조총련계로서는 남한에 사는 친족과 소식이나 안부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민단계라 할지라도 동족의 그런 심정을 박절하게 외면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
이런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국내의 철저한 분단·대결 상태를 잣대로 삼아 재일동포의 언행을 범죄로 본 것은 대단한 잘못이었다. 오씨의 부탁이 만에 하나라도 불온한 전갈이었다면 하필이면 민단쪽의 전위적 역할도 서슴지 않는 홍씨에게 섣부른 말을 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리와는 동떨어지게 1심 결과는 징역 1년에 3년간 집행유예. 몸은 풀려났지만 유죄판결이었다. 민단의 청년운동 간부요 전국체전의 선수단 감독이라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반공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자 재일 민단쪽은 한때 낭패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항소이유서에서 1심 판결의 과오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지적했다.
첫째 “오용수에게… 지정한 장소로 이동 대기하라” 운운하는 전언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말의 뜻과 표현을 견강부회(牽强附會)식으로 각색했다. 둘째, 그 전언 내용이 반국가적, 활동의 편의제공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모종 공작상의 연락이었다면 조총련계 체육회 가입을 거부하고 민단 간부직에 있는 홍씨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리가 없고, 홍씨 또한 그런 청을 들어주었을 리가 없다. 셋째, 이 건 유죄판결은 재일교포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판이다. 그밖의 법률적 측면에서 몇 가지 문제를 삼았다.
끝내 무죄판결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홍씨는 일본으로 돌아가 민단 활동을 계속해서 명예회복을 했고, 나중엔 오사카 민단 단장, 민단 총본부 감찰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조국 분단이 빚어낸 재일동포의 비극 1막이었다.
위장전향간첩 딱지 손유형씨
일본에서 가내영세기업을 경영하던 재일동포 손유형씨는 거래선과 업무협의를 할 겸 골프를 치기 위해서 1981년 4월25일 귀국하였다가 뜻밖에도 안기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에게는 형법상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의 죄가 씌워졌다.
손씨는 제주도 태생으로 14세 때인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자식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큰딸을 조선인학교에 보냈고, 사친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때 제주도에 살던 부모를 초청했고 한국 적(籍)을 취득한 후엔 자주 모국 방문을 했다.
공소사실 첫머리에는 “(손씨가) 제주 ‘4·3사건’에 관련되어 친형제가 국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대한 적개심과 공산주의사상에 기울어져 조총련계에 가입·활동을 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공소장에 따르면, 그는 북측 공작원으로부터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하기 위한 실습을 받았다.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북의 A-3지령을 받았다.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위장 가입한 후 북의 지령에 따라 1971년 7월16일 대한항공편으로 제주도에 ‘잠입’하였다. 그 후 한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각종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하였다.
손씨 자신은 일부 ‘지령’이나 ‘기밀탐지·누설’ 등은 부인하였지만 대체로 범죄사실을 시인하였다. 이 사건은 본시 태륜기 변호사께서 변호를 맡았는데, 그의 항소이유 요지도 “피고인은… 북괴의 꾀임에 빠져 그 요원들로부터 간첩활동을 하도록 지령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1971년 7월16일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한국의 참모습을 목격한 이후로는 간첩활동을 할 의사를 포기하였고, 이후 한국에 수차 왕래한 것은 고향을 찾기 위한 것일 뿐,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간첩 기타 북괴지령 수행을 위한 활동을 한 바 없다. 피고인이 수집 보고하였다고 적시된 기밀사항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공지(公知)의 내용으로 이를 탐지 수집하였다 하여 간첩죄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피고인에 대한 1심의 양형(사형)은 너무 무겁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1982년 11월18일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였고, 이어 대법원도 1983년 3월22일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손씨에 대한 사형은 확정되었다.
사형 집행의 위기에 직면한 피고인과 가족 그리고 일본에 있는 손씨 구명운동단체에서는 다시 태륜기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고 재심운동에 들어갔다.(1983. 5. 18. 재심청구)
유죄 판시사실 중 1971년 5월1일부터 1973년 10월18일까지 사이에 한국에 잠입(왕래)하여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여기에는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 등록과장이 작성한 공문서와 외국인출입국의 기록조사서, 일본 변호사가 작성한 전화녹취서 등이 새로운 증거로 제출되었다.
위의 문서들이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항에서 말하는 ‘형의 면제 또는 가벼운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여지면 사형은 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거론한 2년 5개월 동안 손씨는 일본에만 있었고 일본 밖(외국)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일본 법무성의 조사서에는 쇼와(昭和) 47년(1973년) 이전의 출입국 상황에 대한 기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 사건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태륜기 변호사는 당국으로부터 터무니없는 탄압을 받는다. 그는 일본의 손씨 가족에게 판결문과 1심 소송기록 사본을 보내주었는데, 이것이 트집의 발단이었다.
그 수사기록에 의하면, 한국 안기부요원이 일본 내에서 수사 목적의 증거 수집을 한 것으로 보여져서 일본 의회(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당혹스럽게 된 한국 정부는 태 변호사의 판결문 및 재판기록 사본 인도행위는 법적 시비를 걸 수 없으니까 기상천외의 ‘비행’을 발굴해냈다.
변호사사무소측에서 판결문과 재판기록 복사를 해준 법원 직원에게 소정의 복사비용보다 좀 많은 금액을 준 것을 ‘뇌물공여’로 찍어냈다. 그리고 징계위에 회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바로 이 단계에서 나는 ‘구원투수’ 요청을 받고 1993년 5월19일 손씨 재심사건의 ‘계투’ 변호인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재심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내기 위하여 여러 노력을 하는 한편 전주교도소를 비롯하여 손씨가 이감되는 대전교도소, 대구교도소에 가리지 않고 달려가 몇 년 동안 수없이 접견을 다녔다. 손씨는 감옥 안에서 지병인 고혈압, 당뇨병과 후두암, 위암 등 몇 가지 질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본에서는 ‘손유형씨를 지원하는 모임’을 비롯하여 여러 구명단체들이 여러 해 동안 꾸준한 지원활동과 석방운동을 벌여나갔다.
손씨는 1984년 광복절에 무기징역으로 형이 바뀌어 사형을 면하였고, 1988년 성탄절 무렵에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89년 8월29일 재심이 기각되고 나서 9년 만인 1998년 봄,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뒤 맨 처음 사면에서 잔형집행면제로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 정부의 공직에 있던 나는 석방된 손씨를 만나 여러 해 동안의 고생을 위로했다.
1981년 4월 구속된 때로부터 17년 동안 손씨가 모국의 감옥에서 겪은 어둠의 세월은 조국 분단이 한 개인과 가정에 미친 참혹한 시간이었다.
손씨의 가족들은 손씨가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자 주변사람들로부터 따돌림과 설움을 받았는가 하면, 제주도에 살고 있던 손씨의 모친은 “당신 아들 때문에 집안 망쳤다”는 친척들의 원망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와 딸네 집에서 기거하다가 3년 만에 한많은 세상을 하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