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라는 타이틀에 의지하여 점잖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던 그들이 고난의 아픔을 자청하고 박해를 불러들인 것은 우리에게 참 신앙의 궁극을 깨우쳐주는 ‘생방송’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들을 ‘이단’이나 ‘탈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 1986년에는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개헌 추진 대회가 전국 여러 곳에서 열렸는데 5월3일 인천 대회는 이 투쟁의 절정을 예고하는 고비였다. 동아일보 | ||
1986년 5월13일치 한 일간지 사회면에는 “‘인천사태’ 54명 추가 수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나왔다.
“경찰과 검찰은 (1986년 5월) 12일 ‘5·3 인천사태’와 관련, 대학생 44명 등 54명을 추가로 수배했다. … 추가로 수배된 사람은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인하대, 장신대생 등 대학생이 44명이고 ….”
그 추가 수배자 명단에 “장신대=탁지일(21·3년·휴학)”이란 이름이 박혀 있었다.
탁군은 5월3일 인천사태 당시 민정당 지구당사에 방화하고 극렬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다. 휴학생인 탁지일군은 1986년 5·3 인천사태에 참가하여 수배되었으나 잡히지 않고 도피중, 그 해 11월29일 신민당 서울대회의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1987년 1월16일 서울지검 함승희 검사에 의하여 구속기소되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및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나는 탁군의 아버지인 탁명환 목사의 의뢰에 따라 이 사건의 변호에 나섰다. 탁 목사는 나의 대학동문이기도 한데, 신흥종교 내지 이단종교의 연구·고발운동에 열정을 기울여 오는 가운데, 민·형사간에 여러 번 피소(被訴)되기도 하였다. 그는 번번이 협박과 테러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진상규명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변호사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힘들어하기에 내가 몇 건 맡아서 법정에 나갔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친 부자 변호를 하면서 불의를 외면하지 못하는 탁군의 기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탁군이 각종 시위를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너무 열심히 나서자 부자간에 갈등도 없지 않았다. 여기서 탁군은 좀 더 본격적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자 집을 나와 학교 부근의 친구 자취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는 아들의 ‘가출’을 제지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편지를 통해서 약간의 섭섭함을 표시하면서도 아들에 대한 신뢰와 격려 그리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불의를 보고 항거하지 않는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대목이 탁군의 마음을 한층 굳혀주었을 것이다.
인천 5·3사태는 1980년 5월의 광주 이후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반독재 집회시위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야권 인사의 정치활동금지, 관권·금권 동원의 일방적 부정 등을 감행하고도 신민당에 제1야당의 자리를 내주면서, 어용야당 민한당은 소멸했다.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되어 오다가 1년 후에는 신민당과 재야 정치인이 손잡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되면서 1천만명 개헌서명운동에 들어갔다.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가 전국 여기저기서 개최되었다. 부산을 필두로 광주, 대구, 대전, 청주에서 순차로 결성대회가 열릴 때마다 시민들이 운집하여 뜨거운 성원을 보냄으로써 집권측을 놀라움과 불안에 몰아넣었다.
5월3일의 인천 대회는 그동안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반독재 개헌투쟁의 절정을 예고하는 고비였다. 민통련, 노동운동권, 학생단체 등 여러 민주세력이 인천 주안(朱安)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 문자 그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날의 집회시위는 경찰의 최루탄 및 화염병 세례와 시민들의 투석 등으로 격렬한 ‘시가전’으로 화했고, 정부는 ‘좌경폭력세력의 난동’이라며, 어용언론을 통하여 비뚫어지게 활용하였다. 1백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되었는가 하면, 수배자만도 60여 명에 달했다.
5·3사태에서 야권의 여러 세력은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고 분파성을 드러냈으나 ‘군부독재 타도’에는 공통된 목소리를 냈다.
그날 집회에 참가했던 탁군은 학생운동조직의 연락을 책임지고 있던 터여서,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있었다. 용케 피신한 그는 한 후배의 도움으로 경기도 신갈에 방 하나를 구해서 숨어 살 수 있었다.
그해 11월29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신민당 서울시대회가 열린 날 탁군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예전처럼 시위를 주도하던 중 동대문운동장 근처에서 경찰에 붙들렸다. 그는 경찰에서 구둣발과 주먹 세례를 받아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의연하게 자기 소신을 밝힘으로써 하느님 신앙에 투철한 신학생의 참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배자는 반드시 거꾸러진다는 진리를 확신한다”고 말할 때는 법정 안은 모두 숙연했다.
나는 변론에서, 현실 개조 의지를 이단시하거나 정치적 비판세력을 박해하는 잘못을 지적했다. 근본을 생각하지 않고 단층만 탓해서는 안되며, 학생들의 정의감을 감옥행으로 막아보려는 오산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민당이라는 한 정당의 개헌운동본부 결성대회나 현판식에 왜 재야단체가 그처럼 대거 몰려갔으며, 왜 그런 구호가 나왔는지 알아야 한다. 사태를 악화시킨 경찰의 책임, 자동차가 불타는 장면은 뉴스로 내보내면서도 시위군중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폭력은 눈감는 편파성이 더 문제다. 애투련(愛鬪聯)의 성격이나 선언문의 내용은 결코 용공이 아니며, 반 외세 반 독재는 북의 전략과 무관하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적용은 부당하다.’ 대충 이런 요지로 힘주어 말했다.
그는 1987년 4월2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연세대학교 대학원과 미국·캐나다에서 10년간 유학, 신학과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끝에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은 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울산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영어목회도 맡고 있다. 몇 해 전 그의 아버지 탁명환 목사가 자신의 이단규명 활동에 불만을 품은 측의 테러로 목숨을 잃고 불귀의 객이 되어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기자회견을 하는 진관 스님(왼쪽 세 번째). 그는 절에 은거하는 대신 집회 현장을 다니며 활동한다. 제공=불교인권위 | ||
진관 스님의 본명이 ‘박용모’인 줄은 그에 대한 공소장을 보고 처음 알았다.
진관 스님은 절이나 선방에 은거하는 ‘전통적’ 스님이 아니다. 그는 집회 시위 농성 현장에서도 볼 수 있고, 기독교 예배 자리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감옥이나 경찰서 유치장에도 홀연히 드나든다. 쇠고랑을 차고 법정에도 나타난다. 학술·문화행사에도 그는 열심이다.
그는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서예의 대가가 되고 싶어 중학 진학도 포기하고 출가하여 절로 갔다. 종단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보면서 정규 학업도 계속했다. 대학원에서 만해 한용운 연구로 석사학위도 받았다. 1976년에 <시문학>을 통하여 등단, 시인이 되어 시집도 열 권쯤 냈다. 시조, 희곡, 동화도 창작했는가 하면 그림에도 조예가 깊다.
그런 다재다능한 스님이 민주화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감옥과 법정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 독재광란시대의 조화(造化) 탓이 아닐 수가 없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범민련(汎民聯) 남측본부 정책위원장이라는 직함이 그의 현실참여를 한층 더 잘 상징해주고 있다.
1996년 10월1일, 그는 김제 금산사를 다녀오다가 전주에서 안기부 요원에 의하여 연행됐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회합, 통신)으로 구속되었다. 수사당국은 불교인권위 사무실과 진관이 주지로 있는 광주 미륵정사를 압수 수색했다. 조사받는 동안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재우지 않았으며, ‘언제 어떻게 북한에 갔느냐’는 황당한 추궁을 받았다. 그런 사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캐나다 교포 강병연씨와 관계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전화, 팩스통신이 모두 도청되어 수사의 빌미가 되었던 것.
1996년 11월22일 서울지검 이용훈 검사는 진관 스님을 ‘박용모’라는 이름으로 기소한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인데, 구체적으로는 국가기밀 수집·전달, 잠입, 탈출, 찬양, 고무, 회합 통신 등 여러 가지였다. 공소장은 A4용지 1백38쪽에 이르는 방대한 문서라서 섣불리 요약·발췌하기가 쉽지 않다. 뼈대만 추려보자면 혐의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피고인은 반국가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김인서 등 미전향장기수 출소자 3명의 북송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1994년 11월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캐나다에 사는 친북교포인 범민련 해외대표 강병연에게 전화, 팩시밀리, 우편 등을 통해 국내 불교계와 재야단체의 동향 및 자료를 전달했다. 1995년 9월 캐나다에서 강씨를 만나 불교인권위원회 활동보고서, 한국통신 노조 간부 7명의 인적사항 등을 전달했다. 그 달 19일 중국 북경 시내 한 호텔에서 북한에서 온 김아무개와 이아무개를 만나고 여비조로 미화 4천달러를 받았다.’
이런 행위가 앞서 옮겨놓은 바와 같은 어마어마한 죄면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진관이 이끄는 불교인권위는 전해부터 이른바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북한 불교도연맹측과의 예비회담과 양심수 석방을 위한 남북공동기도문 낭독 등을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통일인사 석방 불교대책위를 구성하여 범민련사건으로 구속된 목사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진관은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그 단체가 1990년 8월15일 제1차 범민족대회에서 “미군·핵무기 철수, 반미, 반전, 반핵, 평화협정 체결, 군비축소,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하여 북한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용공으로 몰렸다. 그러나 그것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 독자적 입장에서 내세운 것이지, 북한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6공 정권이 통일문제를 독점, 민간 참여를 배제하여 민간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 남·북 해외에 범민련이 결성되었던 사정도 법정에서 해명했다.
진관 스님은 북한에서 오는 문건들을 수신 즉시 통일원에 신고하였고, 북한 불교계와 교섭을 위하여 북한주민접촉신청을 수차례나 통일원에 내는 등 합법적 방식을 취하고자 노력했다. 캐나다에서 강병연씨에게 말해준 국내 정치상황이란 것도 신문에 보도되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고, 불교인권위의 보고서 역시 소책자로 공개된 것이어서 ‘국가기밀’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이 부분 국가기밀 수집·전달은 1심에서 무죄).
첫 공판이 시작되자 진관은 미리 준비해 온 글을 모두(冒頭)진술에 가름하여 읽어내려갔다. 그러자 재판장은 모두진술권이 법에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 제지하려 했다. 진관이 5분만 진술하겠다고 하자 재판장은 그것도 너무 길다, 더 짧게 해달라고 당부인지 견제인지 모를 말을 했다. 국보법사건 재판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검사는 15년 징역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고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나는 1984년 가을 한 재야단체의 출범행사에서 고 문익환 목사님의 소개로 진관 스님을 알게 되었으며 그 후 각종 집회, 행사, 재판에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리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1987년의 저 6월항쟁 때도 우리는 각자의 대열에서 시위에 참가했고, 마침내 주동자로 잡혀간 그를 접견하려고 나는 매캐한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야전군처럼 차를 몰았다.
나의 회갑 때 그분은 과분한 축시를 보내주었다. 아무 효험도 없는 나의 변호로 징역 실컷 살고 나온 처지에 ‘양심의 깃발 한승헌 만세’라는 제목의 축시를 써주셨으니, 참 쑥스럽고 무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