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3년 3월24일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 중단 한국군 파병 반대 기자회견에 나온 이미경 의원(오른쪽 두 번째). 과거 유신 독재에 맞서 싸웠던 그는 여성 사회 민주화운동에 헌신해 오다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 ||
1972년 12월, 박정희정권은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절차를 무시한 채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집권의 레일을 깔았다. 이에 분노한 국민 각계의 저항은 거세어져갔고, 유신헌법 반대·개헌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박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 1호라는 위헌적 명령을 가지고 반유신·개헌운동을 처벌했다.
첫 번째로 장준하·백기완 두 분에 이어 기독교계의 젊은 성직자 6명이 ‘개헌서명촉진시국선언기도회’를 열었다가 15년 또는 10년 징역을 선고받은 사실 등은 지난 호의 ‘반유신 싸움 나선 성직자들’에서 살핀 바와 같다.
이처럼 전례 없는 젊은 목사 전도사들의 수난은 기독교계에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구속된 성직자들의 고난을 널리 알리기 위한 유인물을 작성 배포했다가 역시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된 젊은 크리스찬들이 있었다. 김동완(당시 32·약수형제교회 전도사), 권호경(32·서울제일교회 목사), 이미경(23·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회 간사), 차옥숭(2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 박상희(29·한국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4년), 김매자(22·이화여대 의학과 3년), 김용상(24·무직), 박주환(25·한국신학대학 신학과 4년) 등 8명이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교단 또는 그 연합기관에서 일하는 젊은이거나 신학대학생들로서, 그 중 절반인 4명이 여성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긴급조치사건의 변호인으로 나서는 변호사가 매우 드문 때여서 내가 김동완, 권호경, 이미경, 김용상 4명을 맡고, 이건호 변호사가 차옥숭을, 이세중 변호사가 박상희, 김매자, 박주환 3명을 맡아서 변호를 했다.
맨 먼저 김동완, 권호경 두 사람이 일을 꾸몄다. 그들은 김진홍 전도사 등 6명이 구속된 후인 어느 날, 서울 중구 오장동에 있는 한 다방에서 만난다. 그리고 김진홍 등이 시국기도회를 열게 된 경위와 그로 말미암아 경찰에 연행·구속된 사실을 전국 교회에 널리 알려서 여론은 환기시키기로 합의한다. 그 방법으로 ‘개헌 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를 작성 배포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뜻은 이미경→차옥숭→김매자, 박상희→김용상, 박주환 이렇게 릴레이식으로 전달되어 전원의 호응을 얻었다. 각자의 할 일도 분담했다. 김동완은 총괄, 권호경은 비용 조달, 이미경·차옥숭은 경위서 문안 작성, 나머지 4인은 경위서를 등사·발송하는 임무를 각기 맡았다.
1월21일 밤 대현동에 있는 차옥숭의 하숙방에서 이미경, 차옥숭은 문안 작성에 들어갔다.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의 경위’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 첫머리에는 “이제 이 땅의 국민들은 15년의 징역살이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일체 개헌에 대하여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대통령긴급조치1호에 의하면 유신헌법의 개정을 주장하거나 개정청원만 해도 최고 징역 15년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예언자적 양심과 순교자적 용기를 가지고 개헌논의는 민의에 따라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분연히 일어난 젊은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내의 보도기관을 통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진상이 왜곡되어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그 내용을 알리고자 합니다”라고 경위서를 쓰게 된 취지를 적었다.
그리고 김진홍 전도사 등 6명이 긴급조치 철회, 개헌논의 허용 등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경찰에 연행돼 구속되었다는 요지로 초안을 작성했다. 이어서 박상희에게 그 경위서의 타자 발송을 부탁하였고, 박상희는 등사원지에 문안대로 타자를 하고 김용상, 김매자는 이를 등사하여 경위서를 봉투에 넣어 서울, 전주, 대구, 부산 등 수신인 거주 현지에 가서 분산 투함하였다.
‘경위서’ 발송 후 이미경을 필두로 8명 전원이 구속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젊은 성직자들이 개헌서명운동을 하다가 잡혀가서 군사재판에 회부된 사실을 서신으로 알린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긴급조치 제1호의 4항에는 유신헌법을 반대, 개정청원 등 행위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까지도 금한다고 되어 있었고, 이를 어기면 최고 15년 징역까지 과할 수 있게 규정해놓았다.
법정에서 그들은 조금도 약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박상희의 회고에 의하면, “방청석에 앉아 있을 가족들에게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군사재판 법정에서는 기상천외의 문답이 돌출하기도 했다. 단상의 심판관 한 사람이 김동완에게 “이미경이 당신 애인 아니냐”고 물었다. 함께 그런 위험한 일을 한 것을 보면 혹시 남녀애정관계로 얽혀진 것 아니냐는 투였다. 질문을 받은 김동완은 그 순간 천하의 명답을 남겼다. 가로되 “아닙니다. 그러나 저 혼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살기마저 감돌던 법정엔 때아닌 폭소가 터졌다.
김동완, 권호경에게는 징역 15년, 박상희는 징역 10년(항소심에서는 징역7년)이 떨어졌으니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광기 그 자체였다. 이미경, 차옥숭, 김매자, 김용상, 박주환은 각각 징역 3년에 처한다고 해놓고서 그중 세 여성은 “미성년을 갓 벗어난 미혼여성들로서 사리판별능력이 미약하다고 인정되는 등 정상을 참작하여” 5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고 했다. ‘사리판별능력 미약’ 운운은 심판관에게 돌려줄 만한 표현이었다. 네 여성 중 이미경씨는 그 후에도 여성·사회·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다가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활동중이고, 박상희씨는 목사가 되어 교회를 담임하면서 여성·환경·인권운동 특히 성폭력 예방·치료운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 성고문사건 발생 직후인 1986년 7월1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고문·성고문 용공조작폭로대회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 ||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년 제적생인 권인숙씨는 남의 주민등록증을 변조, 자기 이름을 숨기고 가명으로 중소기업체에 위장취업을 했다. 70·80년대의 크고 작은 기업·사업장에는 대학생, 청년들이 자기 신분을 감추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일정한 몫을 해내곤 했다.
이것을 정부 당국은 ‘위장취업’이라고 부르고, 노동자의 의식화·좌경운동이라고 해서 적발·탄압대상으로 삼았다. 권씨도 그런 혐의로 1986년 6월4일 경기도 부천경찰서에 연행된 후 공문서변조 혐의로 구속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 달 14일 권씨와 함께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난 한 여인을 통해 권씨가 경찰관으로부터 성적모욕(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졌다. 7월2일 인천지역 구속자가족 30여 명이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며 부천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다음 날 권씨도 담당 경찰관인 문귀동 경장을 검찰에 고소하자(이날 인천지검은 권씨를 공문서위조 및 동 행사죄로 기소함) 하루 만인 4일에 문귀동은 권씨를 무고 및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맞고소했다. 그 다음날(5일)엔 조영래 변호사 등 권씨의 변호인단 9명이 문 경장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6명을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혐의로 인천지검에 고발했다. 이렇게 해서 세칭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각계에서 항의 규탄이 잇따랐다.
권씨 본인과 변호인단의 고소·고발에 의하면, 문 경장은 권씨가 5·3인천사태 수배자 중 아는 사람을 대지 않는다고 온갖 협박성 언사를 쓴 다음, 권씨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여 권씨가 겉옷(재킷)과 남방만 벗고 벌벌 떨고 있자, 권씨의 바지 지퍼를 밑으로 내리고 브래지어를 올리는가 하면, 바지까지 벗겼다(6월6일 새벽 4시 반부터 6시 반까지 사이의 일이었다).
또한 다음 날(7일) 밤 8시경 문귀동은 권씨가 수배자 신원을 허위로 댔다는 이유로 형사 2명을 옆에 세워놓고 뒷수갑을 채운 뒤 끝내는 속옷까지 벗기고 권씨의 몸을 만지며,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추행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한 인천지검은 7월16일 수사결과 발표를 통하여 문 경장이 권씨에게 폭언·폭행을 했으나 성적 모욕을 가한 사실은 없다고 했다. 검찰은 문 경장이 6일 밤과 7일 밤 권씨에게 인천사태 수배자의 행방을 대라고 요구했으나 불응하자 권씨의 재킷을 벗게 한 후 T셔츠를 입은 가슴부위를 서너 차례 쥐어박아 폭행을 하였다면서 이것은 추행이라기보다 가혹행위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한술 더 떠서, “권씨의 성모욕 주장은 이들 급진세력 등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투쟁의 일환으로 혁명을 위해서는 성(性)까지도 도구로 사용하는 행태”라고 역습까지 시도하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검찰이 8월21일 문 경장을 기소유예처분하면서 내세운 이유였다. 즉 문 경장의 행위는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저지른 우발적 과오로서 이로 인해 이미 파면처분을 받았으며,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해왔고,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있으므로 그 정상을 참작하였다는 것이다. 경찰의 성고문 은폐에 검찰이 앞장을 선 것이었다.
검찰 발표에 분개한 사회 각계에는 검찰에 대한 비난과 문 경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재야법조계에서는 1백66명의 변호사들이 대리인단을 구성하여 인천지검의 문 경장에 대한 기소유예처분을 취소하고 형사재판에 회부해 달라는 제정신청을 제기했다(나는 권씨가 기소된 사건의 변호인이 아니라 제정신청대리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10월30일 검찰의 원 결정을 번복할 만한 이유가 없다며 기각결정을 내렸다. 문 경장이 가혹행위를 한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로서 재발하지 않도록 응징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도 문 경장이 “비등한 여론 등으로 형벌에 못지 않은 고통을 받았다”는 이유를 대며 기소유예처분이 정당하다고 했다. 어이없는 구실이었다. 대리인단은 “문씨는 서울고법이 인정한 사실만으로도 구속 기소되야 마땅하다”고 반론하면서 불복,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대법원은 재항고 접수로부터 1년 5개월 만에, 성고문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1년 9개월이나 지난 후인 1988년 2월29일 재정신청 재항고가 이유있다고 하여 사건을 서울고법에 되돌려보냈고, 서울고법은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문귀동을 공판에 회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 사이에 권씨는 13개월 동안 복역하고 석방된 후 1990년 1월에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 4천만원의 배상금을 받아 서울 가리봉동에 ‘노동인권회관’을 열고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교육을 계속했다. 또한 결혼 후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지금은 대학 강단에서 여성학 교수로 있다.
한편 문귀동은 특별검사(변호사 중에서 선임)가 공소유지를 한 형사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파면당했기 때문에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5년 동안 징역을 살고 만기 석방 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은둔생활로 들어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