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11월2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김대중씨의 대통령선거법 위반사건 담당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사건을 심리하고 있다. 맨 왼쪽이 김대중씨,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다. | ||
1971년 대통령선거 때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씨는 부정선거에서 패하고 해외로 나가 있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 선포 소식을 듣는다. 그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신철폐 등 박정권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1973년 8월8일 대낮 일본의 한 호텔에서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당한다. 그리고 닷새 후인 8월13일 밤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다.
이 같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알려지자 국내외 여론은 놀라움과 충격을 드러내며 박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주목하고 일부에서는 사건의 성격을 ‘정적 살해기도’라고 규정했다. 일본정부는 자국 내 납치는 주권침해라고 주장하면서 김씨의 원상회복, 즉 출국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때 서울형사지방법원은 김씨에게 대통령선거법 및 국회의원선거법위반 사건의 공판기일 소환장을 보낸다. 1974년 6월 초순의 일이었다.
납치당한 피해자가 오히려 재판을 받게 된 셈인데, 정부는 바로 이 재판을 이유로 김씨의 출국 불가를 합리화하려 했다.
문제의 선거법위반 사건은 오래 묵혀둔 사건이었다. 1967년과 1971년, 그러니까 7년 전과 3년 전의 선거(대통령, 국회의원) 때 입건했던 것으로, 공소사실은 이러했다.
①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윤보선 야당후보의 대변인으로서 민주공화당(박정희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여당)이 유권자의 가슴에 리본을 달고 집단적으로 투표소에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②같은 해 6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여당의 김병삼 후보가 “김구 선생 암살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연설을 함으로써 역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③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등록하기도 전에 ‘미·소·중·일 4대국에 의한 한반도 안전보장’ 등 선거공약을 국민에 제시하여 사전선거운동을 했다. 또한 선거기간 중 “박 대통령은 총통제를 기도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다. ④같은 해 대선 후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1백20만 표의 부정투표를 하고 있다”고 연설을 하여 역시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다.
재판은 6월5일부터 시작하여 12일, 19일―이렇게 1주일마다 한 번씩 강행돼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이에 순응하면서 선거 때 자신의 발언은 모두 근거가 있으며, 사전선거운동에 해당되는 일을 한 적도 없다고 시종 자신의 ‘무죄’를 역설했다.
1971년의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박 대통령과 맞붙어 격전을 벌였다. 그는 독재정치 반대, 중앙정보부 해체, 향토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 남북한 대화·교류 등 과감한 정책을 내걸고 전국적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에 박 정권은 중요 국가기관을 동원, 부정선거를 감행해 94만 표 차로 겨우 ‘승리’를 했던 것이다.
이때 혼이 난 박정희 대통령은 그 후 온갖 수단을 다하여 김대중씨를 제거하려 했고, 그 일환으로 김씨의 일본 납치사건이 벌어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선거법위반 사건의 김씨 변호인으로는 박세경, 유택형, 이택돈, 한승헌 네 변호사가 나섰다. 나는 공판이 있는 날 동교동 자택에 가서 그날의 공판대책을 협의한 뒤 함께 법정으로 나가곤 했다. 8회 공판(6월19일)에서 검찰은 당시 여당 중진 등 1백71명의 증인을, 변호인측은 윤보선 정일형씨 등 야당인사 15명을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재판부가 이를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모두 1백86명의 증인이 채택되었다.
김씨는 6월29일에 열린 제9회 공판에서 재판부의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재판부를 기피하겠다고 하여 법정을 긴장시켰다. 재판부 기피신청에 대하여 서울고등법원이 그 해 12월18일, 서울형사지법 합의8부 박아무개 부장판사에 대한 기피신청이 이유 있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법원은 사건을 합의6부(황석연 부장판사)에 재배당했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새 재판부는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진 지 3개월이 다 되도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공판을 열지 않았으므로 우리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공판기일을 빨리 지정해서 재판을 계속하자고 신청을 했다.
그리고 2주일 만인 (1975년) 3월21일 나는 갑자기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김씨의 선거법 위반 사건 변호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중단됐던 재판은 내가 구속된 지 나흘 뒤인 3월25일 아홉 달 만에 다시 열렸다. 17회 공판이었다. 이날 김씨는 대통령선거제도가 바뀌어 공소장에 기재된 적용법조가 모두 폐지되었음을 이유로 공소취소를 요구하여 검찰과 논쟁을 했다. 김씨는 이 공소장의 유일한 목적은 정치보복이라고 맞섰다. 변호인단은 그 뒤에도 두 번이나 더 법관 기피신청을 냈으나 모두 대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 해 9월12일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이창우 검사는 김씨에게 금고 5년을 구형했다. 1967년 기소된 후 전후 27회 공판까지 가는 대장정이었다. 선고공판은 결심 후 3개월 만인 그 해 12월13일에 열려 금고 1년이란 판결이 나왔다. 김씨는 이에 불복,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이 사건 재판을 하지 않은 채 13년을 미제사건으로 방치하다가 1988년 2월5일 “검사의 공소제기(1971. 7. 26.) 후 확정판결 없이 15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免訴) 판결을 냈다.
그때 김씨는 제1야당인 평민당의 총재였는데, 이 사건은 ①불공정 재판을 이유로 한 법관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져 재판부가 바뀌었고, ②기소 후 1심만도 27회 공판에 8년이나 걸렸고 ③항소 후 13년을 방치하다가 기소 후 15년을 그냥 넘겨 면소판결이 나오는 등 희귀한 기록을 남겼다. 그 이유나 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는 점을 족히 알고도 남을 만한 현상이었다.
▲ 1995년 12월 프레스센터에서 4·19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전대열씨. 그는 4·19 직전 전북대생들의 4·4 시위를 주도했다. 사진제공=전대열씨 | ||
1985년 2월12일에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 전대열 후보는 서울 제6선거구(도봉지구)에서 출마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역구 선관위에서 ‘국회의원 후보등록 무효’ 통고가 날아왔다. 그것도 투표일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그랬으니, 어이가 없었다. 선관위의 주장인즉, 전씨는 국회의원선거법 제12조 2항에 의하여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후 형 실효선고를 받은 사실이 없어서 피선거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씨는 1977년에는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복역하였고, 1980년 계엄포고령위반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특별사면으로 잔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그 후 1984년 8월14일 복권령에 의하여 복권되었다. 그런데 선관위측은 위 복권은 1980년의 계엄포고령위반 부분이므로 1977년의 긴급조치위반 부분의 복권은 안된 것으로 봤다.
하지만 만일 선관위의 견해처럼 사건별로 복권조치가 따라야 한다면, 1984년 8월14일자 복권조치는 아무런 의미도 실익도 없게 된다. 더구나 전씨는 후보등록서류를 제대로 갖추어 적법하게 후보등록을 하였으니, 선거일을 하루 앞두고 후보자격을 문제 삼은 것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전씨는 선거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인 자기에 대한 탄압이라고 보고 소를 제기했다.
그러나 선거 무효사건의 단심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은 ‘원고 청구기각’으로 나왔다. 원고인 전씨의 입장은 분명했다. 즉 “원고가 1984년 8월14일자로 복권이 된 이상 비록 원고에게 위의 계엄포고령위반으로 인한 수형 사실 이외에 (전술한) 긴급조치위반 등 죄로 형의 선고를 받은 사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복권기준일 이전에 있었던 수형사실로서 원고의 피선거권에는 아무런 장애사유가 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위 선거위원회가 이를 이유로 원고의 후보자 등록을 무효로 처리한 것은 위법이며, 이와 같은 위법은 동 선거구의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할 것이므로 동 선거구의 선거는 무효”라고 선거무효 사유를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권은 어디까지나 계엄포고령위반 부분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지 그전의 긴급조치위반 부분에는 미치지 아니하므로 원고에게는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의 피선거권이 없다는 요지였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많은 사람들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되고 탄압을 받는 가운데 피고인의 몸으로 법정에 서서 유죄판결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씨처럼 두 번 이상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한 번의 사면·복권으로 석방되거나 자격을 회복하여 선거에도 나가고 공직에 취임한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맨 나중의 수형사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면 그 전의 수형사실도 당연히 복권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복권의 법리에도 맞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전씨는 1980년 봄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많은 재야인사들이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나와 같은 사동(舍棟)에 갇혀서 함께 고생을 하였다. 전씨는 오랫동안 줄기차게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가 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정치정화법의 굴레가 씌워졌던 데다 유죄판결에 이은 실형의 전과 때문에 공직선거의 피선거권이 박탈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 서울 도봉구에 출마했다. 그는 선거운동을 감당할 만한 자금이 없었지만 고대생을 비롯한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나와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투표일 바로 전날, 지역 선관위에서 전씨의 ‘후보등록 무효’ 통보가 우편으로 날아왔던 것이다. 그 날 오후 늦게 열린 중앙선관위에서도 역시 긴급조치위반 부분의 복권이 안되어 후보자격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의 딱한 호소를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다는 심경에서 몇 사람의 변호사가 선거무효소송을 돕기로 뜻을 모으고 그 중 이원형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이 되어 수고해주기로 했다. 대법원은 전원재판부로 넘겨 심리했으나 시일을 끌기만 했고 전씨는 이를 참지 못하여 탄원서를 냈고 마침내는 대법원장을 ‘직무유기’로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
그는 4·19 직전 전국 최초의 ‘전북대 4·4데모’를 주도한 것을 비롯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 민주통일당 대변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