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0년 8월15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출정식 당시의 강희남 목사(오른쪽 한복 입은 이). | ||
1994년 7월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이 온 세계에 전해졌다. 남한의 언론들은 이를 그야말로 대서특필하고 특집보도에 열을 올렸다. 더구나 열흘 뒤면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하게 되어 있는 그 시점에서 갑자기 부보(訃報)가 날아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에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범남준)에서는 애도 성명을 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일대 전환점이 될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이러한 비보를 접한 데 대해 놀라움과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범남준은 조문단을 구성하여 임진각을 향하여 떠나기로 했다. 이어서 조문단의 북행에 관련된 협조공문을 팩스로 통일부에 보냈으나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범남준 위원장인 강희남 목사(본명 강재우)는 출발을 결행하기로 하고, 그 달 16일 오전 범남준 사무실에서 “판문점을 통해서 입북코저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강 목사는 그날 정오 무렵 범남준 사무실 앞에서 택시를 타고(안희만 사무처장 동승) 판문점을 향하여 출발했다. 차가 구파발을 거쳐 고양시 삼송동을 지날 때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그러나 “북에 조문 간다. 길 비켜라”라고 쓴 널따란 종이를 펴들고 계속 달리다가 13시20분경 고양시 내유동 검문소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검찰은 과거의 범민련 활동과 김일성 사망 애도 성명을 문제 삼아 ‘이적단체 구성, 반국가단체 찬양’으로, 조문 방북 기도는 국가보안법상 탈출예비죄로 강 목사를 범남준 부의장 전창일씨와 함께 구속 기소하였다.
첫 공판은 그 해 10월28일 오후 3시, 서울형사지법 423호 법정에서 열렸다. 방청석에는 신창균, 조용술, 한상렬, 김병걸, 남정현 등 민주·통일운동부문의 인사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강 목사가 입정하자 법정 안은 방청석의 뜨거운 박수소리로 덮였다. 인정신문에 이어서 강 목사의 모두진술(冒頭陳述)이 시작되었다.
“죄가 없다든가 안된다든가 하고 변명하는 입장은 아니다. 양심의 법 즉 자연법과 세상의 법이 대립되면, 세상의 법 버리고 하느님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 맹자 말씀에 생(生)과 의(義)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고난당하는 민중을 생각할 때, 역사의 방관자로 살 수 없고, 죄 없이 끌려가 고문당하는 민중 위해 죽지 못하며, 외세 강압으로 그어진 38선, 분단 반세기의 조국, 그 통일 위해 죽지 못하면 감옥이라도 가야지…. 75세의 환자이지만 민족사에서 위선자와 방관자로 살아왔다면 감옥 안에서 푸른 옷 입고 죽어가는 것이 옳은 길 아니겠는가.”
“이렇게 주목받는 통일운동, 왜 하느냐? 통일원 있지만 통일과 정반대의 일만 하고 있다. 대북 창구 일원화 운운하는데 (정부) 신임할 수 있으면 일원화 좋으나 통일원 하는 짓이 틀렸다. 그래서 통일 위한 민간운동단체가 필요하다.”
이어서 그는 조문 방북의 당위성에 대해서 심경을 고백했다
“내가 북에 가려고 한 것은, 김 주석이 안 죽었으면 7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이 북에 가서 반갑게 만나 만찬하고 민족의 장래 논의할 상대가 죽었는데, (안면) 싹 씻고 누구 하나 간다는 사람 없고 해서 내가 판문점 통해서 간다고 했다. 그렇지만 갈 수 없지 않느냐? 남한에서 누군가 가려고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YS가 죽으면 북에서 온다고 안했겠느냐? 내가 남한의 체면이라도 세우자고 한 일이었다. 갔다 오지 않았으면 그뿐 아닌가. 그 전에 범민련 한 것.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그래서 괜찮은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와서 그것을 문제 삼아 기소하다니, 이것은 권력의 횡포다.”
오후 4시18분에 강 목사의 모두진술은 끝났다.
12월2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공안부 황교안 검사는 강 목사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구형했다.
먼저 공동변호인인 이덕우, 임종인 두 변호사가 변론을 했고, 이어서 내가 변론을 했다. 나는 이적단체 구성, 이적표현물 제작, 반국가단체 찬양 등 혐의의 전제가 되는 반국가단체론 즉 북한이 반국가단체인가―라는 점에 대한 법리와 현실론을 자세히 언급한 다음, 김 주석 사망 조문행차에 관해서 언급했다.
우선 영업택시 타고 평양 간다는 것 자체가 불능범이라는 것, 국내 이전(移轉)의 자유가 있는데 임진각을 향해 가던 도중에 붙들린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반국가단체론을 두고 대법원 판례에 기속당한다고 숙명론처럼 말하지 말고 종래의 대법원 판례를 변경시킬 만한 과감한 판결을 해주기 바란다. 이런 요지로 말했다.
해가 바뀌어 1995년 1월6일, 재판부는 강 목사에게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2년 6월에 4년간 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고인측은 굳이 항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승복 아닌 불신 때문이었다.
강 목사는 1977년 11월에도 반공법, 긴급조치위반 등으로 징역 10년을, 1987년 7월에도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바 있었다.
▲ 김해성 목사(가운데 양복 입은 이)가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연수생제도 철폐 시위에 참가하던 모습. 사진제공=외국인노동자의 집 | ||
1996년 6월3일, 경기도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이 있는 주민교회 앞에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 진료상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곳에 찾아온 네팔인 로잔 구릉씨(34) 부부를 체포하여 차에 실었다.
경찰은 5백여 명의 무장병력을 투입하여 현장에서 연행을 저지하려던 노동자의 집 실무자와 주민들을 강제해산시키고, 그 노동자의 집 소장인 김해성 목사를 공무집행방해로 긴급 구속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김 목사를 접견하러 간 노동자의 집 사무국장 양혜우씨까지도 구속해버렸다. 소위 ‘문민정부’를 표방한 YS정권 아래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인지 모두들 분개했다.
나는 구속 직후인 7월9일 성동구치소에 가서 김 목사를 접견했다. 그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
김 목사는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차량이 골목을 차단하고 검문을 한 끝에 외국인 노동자 2명을 연행한다는 말을 듣고 주민교회 앞으로 쫓아갔다. 네팔인 노동자 부부가 불법체류자이긴 하지만 부인이 소파수술을 받은 환자여서 노동자의 집과 치료비 감액협정을 맺은 병원에 가기 위해 도장을 받으러 온 참이었다.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마구 네팔인 부부를 끌어가는 것은 교회의 입장, 목사의 입장에서는 방관할 수가 없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교계 단체에서는 김 목사 등의 구속에 항의하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실인즉, 국내에 들어와 취업중인 외국인 노동자의 근무환경과 인권은 매우 열악하여 진즉부터 사회문제가 되었고, 교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은 그들의 인권 보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악용하여 그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악덕 기업주가 횡행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교회는 그들의 어려움을 돕고 인권을 지켜주는 일을 새로운 선교 차원의 과제로 설정했다. 그 중에서도 성남주민교회(담임 이해학 목사) 안에 있는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소장 김해성 목사)은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의지하고 찾는 곳이었다. 김 목사는 성남의 산자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전국 외국인 노동자대책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 주변에서나 언론에서는 그를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로 일컫기도 했다.
기독교계를 비롯한 각계의 석방요구에도 불구하고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그를 양혜우 사무국장과 함께 구속 기소하였다.
공소장에 의하면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네팔인 부부를 체포하여 차량에 태우자 양혜우씨 등이 프라이드 차량을 몰고와 연행차량 앞을 막고 진행할 수 없도록 했는가 하면, 김 목사 등은 출입관리사무소 차량 밑에 드러누워 출발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그날 오후 2시15분부터 9시10분경까지 약 7시간 동안 일대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실정법의 잣대만 들이댄다면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할 만도 했다. 그러나 김 목사를 비롯한 교회측은 사태의 원인과 본질문제를 중요하게 보았다. 외국인 노동자, 특히 그 중 불법체류자의 인권과 생존권을 먼저 생각하면서 국적을 초월한 사랑의 정신으로 문제해결에 접근하고자 했다.
합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라 하더라도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린다. 김 목사가 그런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나서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그는 한국신학대학 2학년에 다닐 때부터 성남 주민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빈민 문제와 노동자 문제를 파고들었다. 졸업 후 노동체험을 위해서 동원광학이란 기업에 취직했다가 1년도 못 가서 ‘위장취업’이 드러나 해고되었다. 그후 성남시 하대원동 공단 입구에 아주 작은 규모의 ‘산자교회’를 세우고 노동자들의 임금체불, 산업재해, 노조결성 등 문제를 돕기 시작했다.
1992년경부터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찾아와서 애로사항을 털어놓고 해결방안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의 애로를 해결해주고자 뛰어다니다가 과로로 자신이 입원하게 되었다. 그때 김 목사를 문병 왔던 목사, 변호사, 교수들이 뜻과 힘을 모아 1994년 4월에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문을 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법원은 7월6일 양혜우 사무국장을 석방한 데 이어, 16일에 김 목사도 보석으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달 25일 징역 8월에 1년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는 석방 후 “중국교포 노동자들의 집단 연행에 가슴 아프다”면서, 한국소비자연맹이 애완견보호법 제정을 위해 입법 청원을 서두르고 있다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애완견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오랜 노력의 결실로 2003년에는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입법화되어 18만명의 외국인이 불법체류의 ‘위법상태’에서 풀려나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있게 됐다.
‘외국인 노동자의 집’은 이제 성남뿐 아니라 서울, 안산, 양주 등에도 센터를 두고 노동상담, 무료진료, 한국말 교육, 쉼터 제공 등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연간 3만~4만명의 외국인들이 이곳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