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트 페어런츠>에서 거짓말탐지기 사용 장면. | ||
81년 9월21일 오전 8시30분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S식당 부근에서 한 여대생의 시신이 발견됐다. 식당 동쪽 건축자재 야적장 인조석 더미 속에서 발견된 시신은 3일 전 오빠 집을 나선 뒤 실종된 부산산업대학 3학년 박아무개양이었다. 발견 당시 사체에는 타박상뿐 아니라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고, 목을 졸린 흔적도 뚜렷했다.
경찰은 그 해 여름 박양과 함께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장아무개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박양과 장씨, 두 사람과 함께 어학연수를 다녀온 정아무개씨를 조사하던 중 그로부터 범행 일체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
경찰은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고, 검찰은 정씨를 살인, 사체 유기 및 절도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정씨는 법정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도리어 검찰에서 했던 자백은 수사관들의 고문 압박을 못 이겨 했던 허위 진술이라고 주장했다.
이례적으로 정씨의 주장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서울 동부지원 형사부(재판장 양기준 부장판사)가 82년 7월9일 정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정씨가 검찰에서 진술한 자백 내용 중 몇 가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나머지 증거들도 피고인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취지를 밝혔다. 검찰의 항소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도 같은 해 11월20일 똑같은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도 피고인의 검찰 진술을 믿지 않았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주심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였다. 이 전 총재는 피고인 진술의 ‘임의성’은 인정했다. 자신의 생각을 진술했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했다. 그 이유는 자백 내용 자체가 합리성을 띠고 있지 않다는 것. 특히 대법원은 피고인이 자백을 한 동기가 거짓말탐지기 검사 과정에서 무심코 피고인이 던진 말을 수사관들이 확대해서 과대 포장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수사 당시 수사관들은 범행을 부인하는 정씨를 상대로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했다. 수사관들은 정씨가 검사 과정에서 “가슴이 떨린다”고 말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졌다. 정씨는 검사 직전에 한 말이라며 부인했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이 말이 정씨가 주장하는 대로 거짓말탐지기 검사 직전에 한 것인지 아니면 검사 도중에 나온 것인지 정씨와 함께 확인하기로 했다.
수사관들은 만약 후자일 경우, 정씨에게 “범행사실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압박했고, 정씨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거짓말탐지기 검사 과정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분석한 결과, 검사 도중 “가슴이 떨린다”고 말을 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정씨는 ‘약속’에 따라 ‘범행 사실’을 시인하고 자백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수사관들은 거짓말탐지기에서 잡힌 피의자의 심리나 신체상 변화를 종합해서 범행 여부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피의자의 말 한마디에 집착해 혐의를 입증하려 했던 셈이다.
그러나 1, 2심 법원은 물론, 대법원도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자백한 뒤 줄곧 자신의 진술이 허위자백이라고 진술했던 정씨의 주장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가슴이 떨린다”는 말을 실제 검사 과정에서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본의 아니게 거짓 진술을 했던 점도 그렇거니와, 실제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에서도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관들이 정씨에게 사용한 거짓말탐지기 기종은 ‘울트라스크라이브’였다. 여기에 긴장의 절정 여부를 판단하는 ‘피오티’(POT) 검사 방법도 동원됐다. 수사관들은 이러한 기법을 통해 범행 당시 피해자가 입고 있었던 상의 및 피해자의 오빠 집 전화번호 등을 묻고 피고인이 이를 알고 있었는지를 검사했다.
그런데 당시 검사 결과에는 피고인이 ‘모른다’고 한 답변이 모두 ‘거짓’으로 판정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즉 피고인이 질문에 대해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른다고 대답한 것으로 해석을 했던 것이다. 대법원은 이 같은 검사 결과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주심이었던 이 전 총재는 83년 9월13일 이러한 연유를 들어 상고심 판결에서 검찰의 상고를 과감하게 기각하고, 정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이례적으로 이 전 총재는 거짓말탐지기가 정확한 증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거짓말탐지기가 증거로 인정받기 위해서 첫째, 거짓말을 하면 반드시 일정한 심리상태의 변동이 일어나야 하고, 둘째, 심리 상태의 변동 과정이 반드시 일정한 생리적 반응으로 이어져야 하며, 셋째, 그 생리적 반응에 의해 피검사자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가 정확히 판정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명시했다.
재판부는 △(해당) 거짓말탐지기가 생리반응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장치였는지 신뢰할 수 없으며 △특히 조사관들이 피고인이 모호하게 모른다고 대답한 부분에 대해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전체적으로 검찰이 실시한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에 증거 능력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거짓말탐지기 사용이 수사상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검사 과정에서 공정성과 결과의 정확성만 담보할 수 있으면 증거능력이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거짓말탐지기는 용의자가 범행을 했는지 여부와 함께, 진술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장치로서 쓰임새가 커졌다. 교통사고 등 각종 민사사건에서도 효용가치가 높다. 거짓말탐지기의 검사 결과가 사건의 전말을 뒤바뀌게 한 사례도 계속 터져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보자. 90년 10월 대법원 판결 사건이다. 이 사건 공소 사실은 ‘강아무개 피고인이 89년 6월 오후 9시50분경 자신의 오토바이에 피해자 김아무개를 뒤에 태우고 가다가 상주시 남성동의 약국 앞 도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피해자 양아무개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킨 뒤 위 피해자들에게 상해를 입히고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1심, 2심 재판부도 모두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진상은 달랐다. 사고가 일어나던 날 피고인 강씨는 고등학교 동창인 피해자 김씨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김씨가 술이 많이 취하자 강씨는 김씨 소유 오토바이 뒷자리에 김씨를 태우고 갔는데 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피고인 강씨가 오토바이를 몰던 도중, 김씨가 자기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자리를 맞바꾸었는데 그 뒤 사고가 난 것이었다.
피고인 강씨는 1·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뒤 90년 7월 사건 재수사를 요구했고, 경찰은 사건 관계자들을 상대로 재수사를 시작했다. 재수사 도중 놀랍게도 김씨의 입에서 “내가 오토바이를 몰았다”는 진술이 나오게 됐다. 곧바로 경찰이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해 김씨를 검사한 결과 ‘진실’ 반응이 나타나면서 피고인 강씨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지난 2004년 10월에는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 뒤 사망한 동승자를 음주운전자로 몰아세운 두 연인이 거짓말탐지기 때문에 혼쭐난 사건도 있었다.
그해 10월24일 새벽 4시50분경 대구시 동구 지묘동 공산터널 입구. 옵티마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차 안에는 박아무개씨(23)와 애인인 권아무개씨(20), 그리고 박씨 선배인 차아무개씨(28)가 타고 있었다. 운전자 박씨와 애인은 다행히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그러나 조수석에 타고 있던 차씨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실제 사건은 박씨가 음주상태(혈중알코올농도 0.079%)에서 선배의 옵티마 승용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낸 것이었다. 자신의 음주운전 사실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던 박씨는 애인 권씨와 “숨진 차씨가 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다”고 입을 맞췄다. 차량 소유주는 숨진 차씨. 그대로 묻힐 수 있는 사건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운전자가 누구인지 식별하기 어렵다’는 결과를 해당 조사 경찰에게 통보했다. 이들의 진술이 그대로 굳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 거짓말탐지기가 ‘실력발휘’를 했다. 경찰은 두 사람에 대해 모두 7차례에 걸쳐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했는데, 두 사람 모두 ‘거짓’ 반응이 나왔다. 이를 토대로 집요한 추궁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마침내 범행사실을 자백했고, 경찰은 사고 1백24일 만에 박씨를 교통사고특례법 위반으로, 권씨를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04년 8월 서울 사당동에서 택시를 타고 경기도 안양의 집으로 향하던 대학생 황아무개씨(여·22)는 과천 부근에서 요금 문제로 기사 강아무개씨(41)와 시비가 붙었다.
시비가 커지자 황씨는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휴대전화에 부착된 카메라로 강씨의 택시기사 자격증을 찍으려했다. 그러자 강씨는 택시를 세우고 황씨를 끌어내려 얼굴 등을 마구 때린 다음 자리를 피했다.
황씨는 곧 인근 경찰서를 찾아가 “강씨에게 맞았다”고 신고했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황씨는 얼마 후 서울지역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아버지에게 “(강씨가) 내 지갑도 훔쳐갔다”고 말했고, 그 뒤 경찰은 강씨를 붙잡아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황씨를 때리기만 했던 강씨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보다 신중했다. 처음 폭행 사실만을 신고한 황씨가 뒤늦게 지갑을 뺏겼다고 진술한 점에 의문을 품었던 것. 검찰이 황씨에게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받아보자’고 하자 황씨는 소환에 불응하는 한편 뒤에서 강씨와 합의를 시도했다.
게다가 얼마 후 황씨의 지갑이 다른 곳에서 발견됐다. 어디선가 지갑을 잃어버린 뒤 강씨에게 덮어씌울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황씨는 결국 무고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 사건의 경우, 검찰이 “거짓말 탐지기를 쓸 것”이라는 말만 했을 뿐인데도 피의자가 지레 겁을 먹었던 셈이다.
이처럼 거짓말탐지기의 위력이 입증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사용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용 적체 현상’까지 빚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일선 경찰서가 수사과정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하려면 신청 후 평균 2개월이나 기다려야 할 정도라는 얘기도 들린다.
쓰임새가 늘고 있지만 실제 거짓말탐지기는 그 수요를 다 충족할 수 있을 만큼 보유량이 많지가 않다. 전국 경찰이 보유한 거짓말탐지기는 불과 36대. 최근 일반 형사뿐만 아니라 교통사고 조사 과정에서 사용 신청이 늘면서 지난달부터는 거짓말탐지기 7대를 아예 교통사고 조사 전용으로 따로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짓말탐지기를 보유하지 못한 지방경찰청은 각 1대씩을 새로 도입할 계획이라 한다.
잘만 활용한다면 거짓말탐지기 조사가 수사관의 심리수사능력과 첨단장비가 결합된 과학수사의 결정체로서 앞으로 범죄 수사에서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