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전산시스템은 해당 은행의 경쟁력과 신용도를 대변할 정도로 은행업무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부분. 자칫 전산시스템에 이상이라도 발생하면 수백만 명의 고객정보 및 거래정보가 일시에 사라지는 것은 물론, 은행업무 전체가 마비될 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국내 최대 시중은행인 통합 국민은행이 전산시스템 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어 은행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통합 국민은행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산시스템은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2002년 1월 합병하기 전에 주택은행이 쓰던 시스템이었다. 이를 결정한 사람은 초대행장으로 발탁된 김정태 통합 국민은행장(전 주택은행장)이었다.
당시 옛 국민은행은 합병하기 직전이던 2001년 10월 초에 수천억원을 들여 차세대 전산시스템을 가동한 상태였다. 결국 통합 국민은행이 주택은행 시스템을 쓰기로 함에 따라 옛 국민은행의 시스템은 2개월만 가동된 뒤 무용지물이 됐다.
통합 국민은행은 출범 이후 각자의 시스템을 썼지만, 곧바로 새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5백70억원을 투입해 개발에 들어갔다. 새 통합 전산시스템은 추석 때 시행에 들어갔고, 지난 9월24일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전산 통합이 성공을 거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김 행장의 자축연이 끝나기도 전이던 지난 10월2일 노조측이 ‘전산대란, 국민은행이 망해가고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나섰다. 노조측이 새 시스템을 비판하고 나서자 김 행장은 “향후 1조3천억원을 투입해 차세대 전산망을 개발하겠다”며 또다시 전산시스템 개발 계획을 내놓았다.
김 행장의 계획이 진행된다면 통합 국민은행의 전산시스템은 불과 1년 사이에 옛 국민은행 시스템, 주택은행 시스템, 새 시스템, 차세대 시스템 등 무려 4개의 시스템이 릴레이하듯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2조원이 넘는 돈이 개발비로만 날아갈 전망이다. 전산망 개발에 수천억∼수조원이 들어가고 있음에도 왜 전산망을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지난 연말 통합 선언을 한 뒤 올 초부터 통합전산망 개발에 들어간 국민은행은 8개월여의 작업 끝에 지난 9월20일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통합전산망 개발을 완료하고 전면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9월 말 국민은행은 통합전산망 작업이 성공리에 시행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국민은행 고위 경영진이 주장했던 ‘성공적인 통합전산망’과는 다소 다른 반응이 나왔다. 옛 국민은행 지점을 중심으로 국민은행 지점망에서 통합전산망이 시행된 이후 손님들의 줄이 더 길어지는 현상이 빚어진 것. 그러자 옛 국민은행 노조를 중심으로 통합전산망 때문에 ‘전산대란’이 일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 지난 2000년 합병에 반대해 주택은행과 국민은행노조원 들이 파업을 벌이던 모습. | ||
통합은행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졌던 전산망 채택 문제는 주택은행 전산망 위주로 채택되면서 옛 국민은행 출신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등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이후 올 1월부터 과거 주택은행 전산망을 근간으로 국민은행의 데이터베이스를 덧붙이는 확장형 전산망이 개발됐다. 물론 옛 국민은행 노조에선 지난해 10월 수천억원의 개발비를 들여 옛 국민은행이 개발한 차세대 전산망을 용도폐기하고 ‘과거 모델’인 주택은행 전산망을 택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럼에도 김정태 행장은 전산망은 새 통합은행의 성격과 영업스타일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라며 자신의 경영 방침이 개발과정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통합전산망 시행 후 첫 1주일 동안 지점에서 손님 대기시간이 길어지고 내부 직원들이 1천여 건의 하자 개선을 요구하자 옛 국민은행 노조에선 “통합 전산망 결정이 부당하고 졸속이라고 주장한 노조의 경고가 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국민은행의 전산 책임자인 서재인 전산본부장(부행장)이 최근 사내방송을 통해 ‘사과’를 하기도 했다. 서 부행장은 방송을 통해 건의된 1천여 건의 문제 중 85%는 올해 안에 개선하고, 내년 3월까지 나머지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어쨌든 서 부행장의 방송 내용은 국민은행이 대외적으로 ‘성공적인 통합전산망 가동’이란 주장을 펼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은행 통합 전산본부쪽에선 노조쪽의 ‘전산대란’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제점으로 지적된 1천84건 중 옛 주택은행쪽 직원들이 ‘건의’한 것은 35건이고 나머지는 모두 국민은행쪽 직원들의 문제제기였다는 것.
주택은행 전산망을 기본으로 통합전산망을 개발하다보니 이에 익숙지 않은 국민은행 일선 직원들이 불편을 느낀 것이지, 근본적인 문제점은 없었다는 것. 이에 대해 옛 국민은행 노조쪽에선 다른 주장을 편다. 옛 국민은행 출신 한 직원은 “1천만원 입금을 기록한 것이 2천만원으로 나타나는 등 시스템이 불안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택은행보다 고객이나 영업규모가 훨씬 더 큰 국민은행의 영업실상을 통합전산망이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옛 주택은행쪽 직원들은 “경영진에서 사과한 것은 시스템에 익숙지 않은 옛 국민은행 직원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일 뿐이다”며 현 경영진을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이번 파동은 아직도 상존하고 있는 국민은행 출신과 주택은행 출신간의 잠재적 갈등을 엿보인 대목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일부 직원들은 “전산망통합 책임론을 둘러싸고 주택, 국민 출신의 갈등을 증폭시킬 가능성도 있다”며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