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준(Ratification)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나 총리가 전권을 갖고 다른 나라와 체결·서명한 조약을 국무회의 등의 심의 의결과 공포, 상호교환 등을 통해 발효시키는 행위이다. 보통의 경우는 대통령의 비준만으로 발효되지만, 조약의 내용이 안보에 관한 것이거나, 재정부담을 요하는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는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도록 헌법에 규정돼 있다.
정부와 여당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 간의 4·27 판문점선언에 대한 국회동의를 추진하고 있다. 이 선언의 제목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선언’이다. 민족의 염원을 담은 이 선언은 선언의 격에도 딱 맞는다.
남북 간에는 1972년 박정희 정부시절 7·4공동성명을 비롯해,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 김대중 정부의 6·15선언, 노무현 정부의 10·4선언 등 같은 내용의 무수한 선언, 성명, 합의서가 작성됐다. 이중 일부에 대해서는 국회의 비준동의나 지지결의안이 요구되기도 했지만 처리된 적은 없다.
부분적으로 발효된 것도 있으나 중도에 흐지부지됐다. 말 그대로 ‘선언적’인 선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된 원인은 대체로 북한의 대남도발 때문이었다. 북한의 대남 및 대미 핵위협과 천안함 폭침 등의 대남 도발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선언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가 판문점 선언의 국회비준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선언들과 달리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국가 간의 조약으로 격을 높여서 비준함으로써 남측의 이행의지를 보여주고, 북측에도 상응한 조치로 이행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 점을 이해하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선언의 후속 문서라고 할 9·19평양선언과 남북군사합의서를 비준해 발효시킨 것은 과잉이다. 모(母) 선언 격인 판문점 선언이 발효되지 못한 상태에서 자(子) 선언이 먼저 발효된 꼴이니 본말전도이다.
자유한국당은 북한의 비핵화 일정이 아직 불명확하고, 판문점선언에 따른 대북 재정투입추계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순서까지 뒤바꿔 비준한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청와대의 대항논리 또한 궁색하기 짝이 없다.
평양선언과 군사합의서는 헌법에 국회동의를 규정한 국가 간의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이 비준해도 위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선언을 놓고 판문점선언은 남북 간을 국가 관계로, 평양선언은 비국가관계로 간주하는 뒤죽박죽 논리다.
이런 혼란이 남북관계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긴 해도 여야는 이를 너무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럴 바엔 선언을 선언으로 놔두었다가 북한의 비핵화가 확실해질 때 국회동의를 받게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차피 비핵화가 안 되면 선언들은 휴지가 될 운명이므로.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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