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척하고 한 번 달라고 할까?’
주애란은 새침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산대교를 건너 김포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주애란이 안내한 장어요리집은 수양버들이 늘어선 하천가에 있었다. 1층에는 손님이 몇 팀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자 김포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방이 있었다. 주애란은 몇 번 와 본 일이 있는지 여종업원에게 서슴없이 장어와 술을 주문했다. 오준태는 주애란의 자리에 방석을 깔아주고 털썩 앉았다. 주애란은 정장 상의를 벗어서 벽에 걸고 오준태와 마주앉았다. 블라우스만 걸친 주애란의 모습은 더욱 매혹적이었다.
“선배는 좋으시겠어요. 학생들에게 미술사 강의 하시고….”
“화가가 못 되니까 미술사나 강의하는 거야.”
“그래도 제일 좋은 직업 아닙니까.”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여종업원이 숯불을 가져오고 밑반찬을 준비하는 동안 오준태는 주애란과 IMF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주애란은 오준태가 놀랄 정도로 IMF 상황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다. 남미의 여러 나라가 이미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고 한국도 구제금융을 받고 있기 때문에 IMF 상황은 조만간 극복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수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고 은행들이 통폐합이 되는 등 한국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사태가 10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벌써 종합금융사들까지 부도가 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오준태는 주애란의 박식함에 감탄했고 쉴 새 없이 나불대는 요염한 입술에 넋을 잃었다. 그때 종업원이 들어와서 초벌 구이를 한 장어를 고추장에 버무려서 석쇠에 얹어 놓고 밖으로 나갔다.
“강남의 부동산 경기는 어때? 아파트 시세가 폭락해서 별로 안 좋지?”
“그래도 강북보다는 낫습니다.”
“테헤란로에 있는 빌딩들도 폭락하고 있더군.”
“선배는 전공보다 부동산 쪽에 관심이 더 많으신 것 같습니다.”
장어가 익기 시작하자 오준태는 주애란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한다고 하잖아. 내가 따라 줄게.”
주애란이 살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애란은 의외로 싹싹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시면 저는 고맙지요.”
“건배하자고.”
주애란이 먼저 잔을 들었다. 오준태는 주애란의 잔에 잔을 부딪친 뒤에 술잔을 비웠다.
“지금은 경제가 굉장히 어려운 때야. 그러나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주애란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준태는 주애란의 입술을 주시했다.
“우리가 IMF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수많은 기업이 부도가 나기는 하겠지만 살아남기만 하면 또 한 차례 도약을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오고 있다구.”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군요.”
“전쟁통에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어. 지금이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나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정보도 있어. 강남에서 부동산 한 지 오래되었어?”
“예. 몇 년 되었습니다.”
오준태는 주애란에게 부동산업계에 초짜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강남의 부자들도 많이 알고 있겠네?”
“조금 알고 있습니다.”
“한 200억 동원할 수 있어?”
“2…, 200억이요?”
“왜 그것도 동원할 능력이 없어?”
주애란이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보이자 오준태는 당황했다.
“사안에 따라 다릅니다. 확실한 물건만 있으면 동원할 수 있습니다.”
“테헤란로에 시가 500억짜리 빌딩이 하나 매물로 나와 있어. 그걸 인수하면 2년 안에 200억 정도 차액을 챙길 수 있어.”
“어떻게 500억짜리를 200억에 인수합니까?”
주애란의 이야기는 오준태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중견건설회사 중에 수주액만 8000억 원이 넘는 뉴원이라는 회사가 있어. 이 회사가 단돈 1원에 창보그룹으로 넘어갔어. 알고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뉴원은 서소문에 사옥이 있고 상당히 유명한 건설회사였다. 그런 회사가 단돈 1원에 넘어가다니. 오준태는 금시초문이었다.
“창보그룹이 공작을 했겠지. 창보는 뉴원을 1원에 인수한 뒤에 은행에서 다시 대출을 받아서 밀린 은행 이자를 갚고 운영자금을 마련했어. 창보가 뉴원을 인수하면서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1000억 원이야. 뉴원이 그 돈을 대출받았다면 부도가 나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창보는 은행장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뉴원을 인수할 수 있었어.”
“창보도 결국 부도가 나지 않았습니까? 창보 때문에 IMF가 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대출 받을 줄은 알아도 기업을 경영할 줄 몰라서 그래.”
“그럼 우리도 은행을 잘 이용하면 되겠군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돼. 빌딩 주인이 은행에 약 400억 정도의 채무를 갖고 있어. 경매로 넘어가면 500억짜리가 450억 정도에 낙찰이 될 가능성이 있어. 그러면 빌딩 주인은 50억밖에 못 건져. 그래서 빌딩 주인에게 100억 정도를 주고 은행 채무까지 우리가 안고 인수하면 되는 거야. 100억은 은행에 이자와 원금 일부를 상환하기 위한 자금이고…. 채무 일부를 상환하면 은행은 2년 정도 기한을 연장해 줄 거야…. 그때 우리는 빌딩을 700억에 매도하면 200억을 벌 수 있는 거야.”
오준태는 주애란의 말이 황당하게 들렸다.
“값이 안 오르면 어떻게 합니까. 폭락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흥! 그래서 정보가 중요한 거야. 반드시 오른다는 정보가 없으면 왜 이런 짓을 하겠어?”
오준태는 점점 주애란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희대의 사기사건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돈을 갖고 있는 전주들이라고 해도 주애란을 어떻게 믿고 200억을 투자한다는 말인가. 오준태는 어쨌거나 주애란에게 자세한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시도하다가 실패를 해도 밑질 것이 없는 장사였다.
“그럼 저에게는 얼마를 주실 겁니까?”
“전주와 내가 5 대 5야.”
“그럼 선배와 내가 5 대 5입니까?”
“장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내가 7.5고 후배가 2.5야.”
주애란이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오준태는 순간적으로 주애란이 너무 많이 갖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선배가 너무 많이 갖는 거 아닙니까?”
오준태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마치 복권이 당첨됐는데 서로가 많이 갖겠다고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후배는 전주들한테 2.5를 받아. 그러면 얼마인지 계산이 될 거야. 전주들이 그렇게 챙겨 줄지는 의문이지만…. 욕심을 부리면 일이 성사되지 않아.”
“선배는 정보만 제공해 주고 절반을 갖겠다는 겁니까? 100억이 남으면 50억을 갖겠다는 거 아닙니까?”
“정보 제공하고, 은행 채무 연장하고, 매도까지 내가 관여할 거야. 다시 말하면 이익을 보장해주는 거지. 이런 조건이 세상에 어디 있어?”
주애란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오준태는 고개를 주억거리기는 했으나 구름을 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전주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믿게 하느냐에 달려 있군요.”
“그것이 후배의 능력이 아니겠어?”
“언제까지 해야합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좋습니다. 일주일 안에 쇼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주애란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오준태를 향해 내밀었다. 오준태도 잔을 들어 주애란의 잔에 부딪쳤다.
‘어어, 뭐하자는 거야?’
오준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주애란이 술을 마신 뒤에 자세를 바꿔 앉으려고 하자 짧은 스커트 사이로 통통한 허벅지 안쪽의 하얀 속옷 자락이 얼핏 드러난 것이다. 오준태는 주애란의 하얀 속옷을 보자 아랫도리가 뻐근해 왔다.
‘제기랄. 선배고 뭐고 도장을 확실하게 찍어서 내 여자로 만들어버려?’
오준태는 스커트 자락이 감추어버린 주애란의 하얀 속살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주애란은 약한 매실주였지만 서너 잔을 마셨기 때문에 얼굴이 발그스레했다. 몇 잔만 더 먹이면 술이 취할 것이고 그 틈을 노려 덮치면 제까짓 게 어떻게 하겠는가.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