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나 죽겠네.’
장은숙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면서 은밀한 곳에서 짜릿한 쾌감이 일어나 전신으로 번졌다. 박인철은 허겁지겁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고 있었다. 계집애처럼 희고 섬세한 손이었다.
“가슴이 정말 예쁩니다.”
박인철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그녀의 가슴을 베어 물었다. 장은숙은 허리를 비틀면서 박인철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스스로 블라우스를 벗고 스커트의 호크를 따서 지퍼를 내렸다. 스커트가 스르르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창녀인가.’
장은숙은 박인철을 받아 안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과 이혼을 한 뒤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어 왔는가. 전에는 이런 일을 추하고 음탕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번 남자들과 관계를 갖게 되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고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이성이다.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이성으로 욕망을 억제한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진 이상 억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집착만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혹시 장은숙 씨…?”
스카이라운지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다가와서 물었다. 코 끝에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장은숙이 고개를 들자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한 여인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깨끗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 그리고 목에 걸린 가느다란 금빛 목걸이와 이어링이 상당히 세련되어 있었다.
“누구…?”
장은숙은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으나 누구인지 얼핏 생각나지 않았다.
“장은숙이 맞아?”
“맞는데 누구시죠?”
“나 상희야, 이상희….”
장은숙은 그때서야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상희, 대학동기생이었다.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유학을 갔다는 말을 누구에겐가 들었었다.
“어머, 네가 상희야?”
장은숙은 벌떡 일어나서 이상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상희를 만난 것은 10년 만의 일이었다. 미국에 유학을 갔다더니 세련된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장은숙은 부티가 물씬 풍기는 이상희의 옷차림을 살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너는 얼굴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호호호. 너는 너무 세련되어서 몰라 봤어. 미국으로 유학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언제 한국에 왔어?”
“한국에 온 지 벌써 2년이 되었어.”
“그랬구나. 앉아서 차 한 잔 같이 마시자.”
“그럴까.”
이상희가 장은숙의 옆에 앉았다. 장은숙은 이상희와 함께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이상희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서 서울에 돌아와 여당의 경제정책 브레인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고 2~3년 후에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장은숙은 이상희가 남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장은숙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 결혼을 하고 이혼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했다.
“교제하는 남자는 있어?”
이상희가 정색을 하고 장은숙에게 물었다.
“때때로….”
장은숙은 웃음을 깨물면서 대답했다. 박인철과 방금 호텔에서 섹스를 하고 나온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김동춘도 있고 이따금 용돈을 쥐어주면서 욕망을 해소하는 대학생도 있었다. 그들을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맞지 않았다.
“너는 어때? 왜 결혼을 하지 않은 거야?”
이번에는 장은숙이 이상희에게 물었다.
“굳이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독신주의자는 아냐. 애인은 몇 명 있으니까.”
“애인이 몇 명이나 돼?”
장은숙은 이상희가 당차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섹스 파트너야.”
“재미있게 사는구나.”
“너는 뭘해? 직업은 있어?”
“그냥 데이트레이딩을 좀 해.”
“그래? 그쪽 일은 내가 전문가인데 도와줄 수 있겠네.”
이상희는 장은숙이 묻지도 않았는데 데이트레이딩으로 성공하는 법과 선물 거래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기 때문인지 경제는 물론 주식시장까지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인들의 움직임이야. 외국인들을 따라 투자를 하면 절대 손해를 보지 않아.”
“그걸 알 수가 있어야지.”
장은숙도 외국인들을 따라 매수하고 매도하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도와주도록 할게.”
“도와주면 고맙지.”
“남자들도 만나고 그러니? 누구 만나러 온 거야?”
“실은 어디 갔다 오다가 비가 오는 것을 보려고 올라왔어. 여기서는 비오는 거리가 잘 내려다보여.”
“낭만적이네. 하기야 이런 날 우산 같이 쓰고 덕수궁 돌담길 걷는 애인이 있으면 좋지. 내가 그럴싸한 사람 소개해 줄까?”
“글쎄.”
장은숙은 낯빛을 흐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애인을 두면 투자를 하는데 신경이 쓰이게 된다. 애인은 투자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너 백마랑 놀아봤어?”
“백마가 뭐야?”
“백인 말이야. 미국 남자 소개해 줄까?”
“어머, 어떻게 백인 남자를 애인으로 사귀니?”
“너는 밥만 먹고 사니? 스테이크는 안 먹어?”
이상희가 장은숙의 어깨를 툭 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은숙은 따라서 웃었으나 이상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넌 미국에서 살았으니까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난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어.”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야. 내가 만나는 사람들 절대로 보통사람들 아니야.”
장은숙은 이상희와 30분 정도 이야기를 한 뒤에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이상희가 프레스센터에서 국회의원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상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이튿날 오후의 일이었다. 장은숙은 이상희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덕수궁 앞으로 나갔다. 장은숙이 도착하고 10분도 되지 않았을 때 검은색 외제 최고급 승용차가 와서 멎고 이상희가 내렸다. 이상희의 고급차를 보고 장은숙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차는 얼마나 하니?”
장은숙은 이상희와 나란히 앉아서 물었다.
“글쎄. 한 2억쯤 가나?”
“그렇게 비싼 차야?”
“10억짜리도 있는데 뭘 그래? 롤스로이스 같은 차도 우리나라에 몇 대 들어와 있어.”
장은숙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 나왔다.
“오늘 어디 가는 거야?”
“국회의원 후원회가 있어. 이건 니 봉투다. 니가 그 의원에게 전달해.”
“왜 이런 걸 주는 거야?”
“주면 더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어.”
“이게 얼마야?”
“천만 원.”
“천만 원을 니가 준비한 거야?”
“비공식 후원금이야.”
이상희가 장은숙을 데리고 간 곳은 청평에 있는 한 별장이었다. 그 별장에서는 가든파티가 열리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자주 얼굴을 보던 장관, 국회의원, 재벌 회장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