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국뽕’ 영화다. 묘하게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의 감정을 자극하면서, 1970년대를 알고 있는 국민들의 향수를 일깨우는 애국심은 영화의 곳곳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 애국심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진짜 ‘뽕’에서부터 나온다는 게 이 영화를 범죄 드라마에서 블랙 코미디로 전향시킨다.
14일 오후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마약왕’ 시사회에서 송강호가 답변하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그리고 이 ‘관객 멱살잡이’의 중심에는, 당연히 송강호가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몰아치는 그의 연기는 마지막까지 영화의 고삐를 조인다. ‘비빌 언덕이 없는’ 소시민 이두삼(송강호 분)이 일본과 한국을 들었다 놓는 ‘메이드 인 코리아’ 마약으로 일약 거부의 지위에 오르는 모습을 그의 시각으로 한 번, 주변인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비춰 주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14일 오후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 ‘마약왕’의 시사회에서 송강호는 “영화 속 이두삼이나 다른 인물들은 이제까지 제가 연기했던 인물상과는 상이했다. 가공의 인물이라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 실존하던 인물을 종합해서 만들어낸 인물이다 보니까, 그가 겪은 드라마틱한 삶의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약왕’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전체적인 시놉시스는 픽션이지만, 모티브가 된 것은 실제 일어나는 수많은 마약 유통사건이다.
그는 이어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각각 다른 느낌을 받을지 모른다. 사실 마약이라는 게 어마어마한 사회악인데 결국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종결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며 “이런 부분들에 대해 관객들이 저마다 좀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살인 영화라고 살인을 해본 뒤에 연기를 하는 게 아니듯이, 마약 영화에서도 약을 해본 경험자(?)는 전무했다. 마약을 바라 보는 눈빛에서부터 만들어내는 손짓까지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상상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마약왕’ 이두삼의 뒤를 쫓는 열혈 검사 김인구 역의 조정석은 “마약이 사회악이니 만큼, 배우로서 마약과 관련한 연기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현해서 연기를 해야 하지 않았나. 그러다 보니 다른 분들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 왔다”고 말했다.
이미 앞서 영화 ‘내부자들’로 역대 청불 영화 최고 흥행 신기록을 세웠던 우민호 감독이었다. 마약이라는 민감한 주제와 또 한 번의 청불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에 필요 이상의 과격함을 기대하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우 감독은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더 세게 찍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마약왕의 변화무쌍한 흥망성쇠를 어떻게 톤을 잡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깊었다”라며 “결국 송강호 선배님과 다른 배우들을 믿고 그냥 찍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대로 담아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영화 ‘마약왕’ 시사회에 우민호 감독, 배우 송강호, 배두나, 조정석, 김대명, 김소진이 참석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배두나, 김대명, 우민호 감독
당대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로비스트이자 이두삼의 연인 역할을 맡은 배두나는 12년 전 영화 ‘괴물’ 이후로 오랜만에 송강호와 열연을 펼쳤다. 그는 “‘괴물’을 촬영할 땐 선배님이 ‘큰오빠’ 였고, 박해일 씨가 ‘작은 오빠’여서 그렇게 불렀는데 이번 영화에선 사업적인 파트너이자 애인까지 되니까, 그런 연기를 하면서 좀 웃겼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둘 만의 씬을 촬영하는 중간, 송강호가 “와, 내가 살다살다 두나랑 이런 씬을 다 찍어 보냐”며 혀를 내둘렀다는 비화도 이 자리에서 공개됐다. 아쉽게도 이 씬은 편집돼 영화에선 볼 수 없다.
연인이 따로 있다고 해서 본처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관객들이 자신을 투영해서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두삼의 부인 성숙경이다. 성숙경 역을 맡은 김소진은 송강호가 ‘멀리서 늘 지켜봐 왔다’는 연극계 출신 배우다.
김소진은 “이 영화의 중심인물은 이두삼이지만, 성숙경은 이두삼의 변화무쌍한 삶 옆에서 가깝게,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인물이다”라며 “멈춰야 하는데도 끝까지 멈추지 않는 이두삼의 삶을 따라가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과연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김소진은 영화 촬영 중 송강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에) 주저하거나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가 있었는데, 상대 배우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선배님(송강호)은 모른 체 하지 않으셨다”라며 “저 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 호흡도 선배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 느껴지다 보니 굉장히 든든했다”며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마쳤다.
영화 ‘마약왕’ 언론 시사회에서 열혈 검사 김인구 역을 맡은 배우 조정석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김대명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 ‘정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나’ 믿을 수 없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라며 “더욱이 송강호 선배님과 작업한다는 것은 제 꿈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정말 인생에 몇 번 있지 않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어서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분량은 짧지만 강렬한 임팩트로 관객들의 눈길을 끄는 캐릭터들은 영화의 짜임새를 더욱 촘촘하게 한다. 특히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조직폭력배 보스로 열연을 펼친 조우진(조성강 역)은 ‘내부자들’에 이어 더욱 성숙해진 연기로 관객들의 기대감을 더하고 있다.
우 감독은 “조우진 씨와는 ‘내부자들’ 오디션으로 처음 봤던 배우였는데 ‘내부자들’과 ‘마약왕’ 사이에 우진 씨가 많은 작품을 하면서 더욱 성숙해지고, 이전과는 또 다른 내공과 자신이 붙어 있어 한결 더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영화 ‘마약왕’은 부산의 하급 밀수업자로 생활하다가 마약 제조와 유통에 눈을 뜨며 뛰어난 처세술과 위기 대처 능력으로 단숨에 대한민국과 아시아 마약 업계를 장악한 마약왕 이두삼(송강호 분)의 일대기를 그렸다. 로비로 얼룩진 부패 검찰 속에서 홀로 정의를 좇는 열혈 검사 김인구 역에 조정석, 이두삼을 권력의 중심으로 이끄는 로비스트 김정아 역에 배두나가 연기한다. 19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