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 국보 제 180호 세한도(歲寒圖)로 추사 김정희가 그린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문인화다. 사진제공=과천문화원 | ||
<偶題尋詩圖>
尋詩何處好/ 詩境畵中深
散慮延遐想/ 忘言待好音
枕書交竹色/ 下榻借桐陰
舊雨成天末/ 難爲萬里心
<심시도에 우연히 쓰다>
시구를 찾기는 어디가 좋을까/ 시의 경지는 그림 속 깊이 있구나
근심을 날리려고 사색에 잠겨/ 말 잊은 채 좋은 소리 기다린다
책 베고 누우니 대 빛 어른거려/ 평상을 오동나무 아래로 옮기네
옛 친구 저 하늘 끝에 있고/ 만리 밖 마음 견디기 어렵구나
-추사 김정희-
19세기 초 추사체(秋史體)의 등장은 한국 서예사 2000년에 있어 일대 사건이었다.
추사체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창안한 서체다.
선의 굵고 가늠, 묵(墨)의 연함과 진함,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모양 등이 조화롭게 엮여 글자 하나하나에 구성미와 생동감을 주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회화적 완성감을 이룬다. 이것은 획과 선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해 추상화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예술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술적 완성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명필들의 서체를 추종해온 우리 2000년 서예사에 마침내 한국적 서체가 등장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진경산수와 함께 중국 미술에 대한 우리 미술의 당당한 독자성 선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김정희는 소년 시절부터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박제가(朴齊家)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장했고, 24세 때에는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건너가 청의 문물을 접했다. 특히 당대의 석학으로 알려진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류하며 금석학(金石學)과 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금석학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지만 역시 그의 가장 눈부신 업적은 추사체의 완성이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조선시대이므로 우리나라의 서예도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서예가 본격적으로 하나의 예술 분야로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서성(書聖)으로까지 불리는 동진의 왕희지(王羲之) 서체가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 시대 김생(金生)의 글씨는 중국 송나라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소재한 추사기념관.뉴시스 | ||
이 중에서도 선조 때의 석봉체는 왕희지체를 이어받아 궁궐 서식의 공식필체가 되면서 일세를 풍미했지만 외형미에 치우쳐 서법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조선 후기 영조 정조 대에 이르러 우리 것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진경 문화의 영향에 따라 정선의 진경산수와 함께 서예에서도 우리 고유의 필체가 시도됐다. 이광사(李匡師) 등이 시도한 동국진체(東國眞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서체는 한마디로 모두 일방적인 중국 서법의 숭상 및 추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추사도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해 ‘但以筆法 擧擬良可槪耳(필법만 가지고 좋은 점을 모방할 뿐이니 개탄할 일)’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나라 글씨의 자주적 가능성과 의지가 확연히 싹트는 것은 19세기 중엽 추사체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추사체는 실학의 정신에 청나라 선진문물을 결합한 데다, 끝없는 수련과 오랜 귀양살이가 남긴 인간적 감정을 응집시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추사체는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혼연일체의 빛을 발하며 그의 글씨가 단순한 필법에 그치지 않고 지고한 예술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말대로 ‘가슴 속에 만 권의 서권기(書卷氣; 책을 읽은 기운)를 담고 팔뚝아래 309비(碑)’를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추사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權敦仁)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 등도 모두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제자로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었으나 추사체의 정신을 체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해 결국 그를 능가하는 서예가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