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선 대통령역 맡은 코미디언이 대통령 되는 코미디 같은 일도
# ‘웃음=대박‘ 신흥행공식
지난 1월 개봉된 영화 ‘극한직업’은 1626만 명을 동원했다. ‘명량’에 이어 역대 2위 성적이다. 개봉 전만 해도 ‘극한직업’이 이 같은 성공을 거둘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돼 볼거리가 풍성한 작품도 아니고, ‘핫하다’는 배우가 출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극한직업’의 질주는 모든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그 중심에는 코미디가 있다. ‘극한직업’은 철저하게 웃기는 영화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와 “왜 자꾸 장사가 잘되는데” 등의 촌철살인 대사가 관객을 배꼽 잡게 만들며 입소문이 퍼졌다.
영화 ‘극한직업’ 홍보 스틸 컷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의 만남이 일군 시너지다. 고급스러운 코미디 영화로 평가받는 영화 ‘과속 스캔들’과 ‘써니’의 각색에 참여했던 이병헌 감독은 이미 영화 ‘스물’과 ‘바람바람바람’ 등을 통해 남다른 코미디 감각을 선보였다. 여기에 ‘7번 방의 선물’과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으로 유명한 류승룡이 힘을 보탰다. 이하늬, 진선규, 공명 등도 이전 작품에서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코믹 연기로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놨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기준 호감도 순위가 높은 ‘극한직업’의 관람객 평가를 보면 “오랜만에 부담없이 진짜 코미디 영화를 본 거 같아서 즐거웠다”(godl****), “뻥 안치고 진짜 웃겼다”(sc2j****), “간만에 정치색 안 띠고 마냥 한국식으로 웃긴 영화다”(kui8****) 등 코미디에 대한 호평이 줄을 잇는다.
이런 분위기는 안방극장으로도 이어졌다. 지상파 드라마 몰락의 시대로 평가받는 요즘, 전국 시청률 22%라는 높은 성적으로 지상파의 자존심을 곧추 세운 SBS 드라마 ‘열혈사제’. 특수부대 출신 신부가 악에 맞서 정의를 구현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 드라마 역시 매회 코믹한 장면으로 시청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특히 영화 ‘해적’에서 발군의 코믹 연기를 선보이며 866만 명을 모았던 김남길이 웃음의 중심이었다. 그는 함께 출연한 김성균과 함께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코믹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남길은 ‘열혈사제’를 마친 뒤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코미디를 좋아한다. 김성균과 경쟁심이 생겨 서로 애드리브를 고민하기도 했다”며 “극의 흐름이 지루하지 않도록 진지함 속에 희극적 호흡을 가져가는 주성치 식 코미디를 선보이고 싶다”고 밝혔다.
요즘 지상파와 케이블채널, 종합편성채널 등을 막론하고 드라마보다 예능의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것 역시 대중이 웃음에 목말랐다는 증거다.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있는 부분을 모은 3∼5분 분량의 하이라이트 영상은 수십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한 방송 관계자는 “웃고 즐길 일을 선호하고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라며 “최근 코미디를 앞세운 콘텐츠가 각광받는 것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 점점 더 웃음을 잃어가는 대중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통해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 세계는 웃음을 원한다
지난 4월말 우크라이나에서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희극 배우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대선에서 승리해 진짜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젤렌스키는 지난 2015년 방영된 TV 시트콤 ‘국민의 종(從)’에서 부패한 정권에 맞서며 SNS를 통해 유명해진 후 갑작스럽게 대통령에 당선되는 역사 교사 역할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이후 2년 뒤인 2017년 그는 이 시트콤의 이름을 딴 정당인 ‘국민의 종’을 창당했고 다시 2년 후 우크라이나를 이끌 대통령이 됐다.
젤렌스키는 대선 투표에서 70%가 넘는 지지를 얻었다. 그를 향한 인기가 허수가 아니라는 증거다. 결국 기존 정치에 실망감을 느낀 대중이 그들에게 웃음을 준 젤렌스키에게 마음을 연 셈이다.
영화 ‘어벤져스 : 엔드게임’ 홍보 스틸 컷
이런 웃음 코드는 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개봉 약 보름 만에 2조 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며 ‘아바타’에 이어 전 세계 영화 흥행 2위에 오른 이 영화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1막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인류를 넘어 전 우주를 구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웠지만 적절한 웃음을 던지는 책임도 잊지 않는다.
너구리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말을 하는 로켓을 향해 아이언맨이 “인형 아니었어?”라고 묻고, 캡틴아메리카가 엎드려 쓰러진 자신의 뒤태를 바라보며 “이쯤 돼야 미국의 엉덩이지”라고 말할 때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이외에도 한층 유머러스해진 헐크와 망가진(?) 토르, 여전히 장난기가 넘치는 스타로드 등이 쉼 없이 웃음을 선사한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지난 10년을 정리하느라 러닝타임만 3시간이 넘는 긴 서사시지만 이런 웃음 포인트가 군데군데 숨어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시간이 흐른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때 코미디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한껏 살리고 주위를 환기한다”며 “특히 전편에서 전 우주의 생명체의 절반이 사라져 집단 우울증에 빠진 영화 속 인물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적절한 코믹 코드는 웃고 싶어 하는 이들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요소가 됐다”고 분석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