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3일 증권거래소는 국민은행의 상반기 영업 실적을 발표했다. 앞서 금융가에서는 국민은행의 올 상반기 영업실적이 그다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오가고 있었다.
SK사태로 인한 충격에다, 국민은행과 최근 합병한 국민카드사의 부실 등이 실적부진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적은 예상치보다 더 나빴다.
▲ 국민은행 광고 속의 충무공 동상에 김정태 행장의 얼굴을 합성한 이미지. | ||
사정이 이렇자 김정태 행장은 서둘러 국민은행의 고강도 구조조정, 점포 폐쇄 등을 주주들에게 약속하고 나섰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이런 와중에 국민은행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합병 전 국민은행 출신과 주택은행 출신 직원들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서서히 불거진 부분. 그동안 아슬아슬한 관계를 지속해왔던 ‘한지붕 두가족’인 과거 주택은행 직원과 국민은행 직원들은 통합 2년여 만에 정면으로 충돌할 태세다.
사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있다. 국민-주택은행 출신간 격돌조짐은 지난 6월 초부터 터져나왔다. 지병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김 행장이 출근해 가진 첫 월례조회에서 “일부 임직원들이 최고 경영자와 가치관이 다르거나, 조직을 혼란시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내부문제를 공개적으로 밝혔던 것.
김 행장의 이 발언 이후 부행장급 임원들의 집단 사표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김 행장은 마치 이를 기다렸다는 듯 부행장급 임원 중 세 명의 사표를 즉각 선별 처리해버렸다.
사표가 수리된 임원은 영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복완 부행장과 전략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최범수 부행장, 그리고 전산본부장을 맡고 있는 서재인 부행장 등이었다. 이들이 맡고 있는 사업부는 그야말로 가장 핵심인 부서.
현재 국민은행은 ‘사업부제’로 영업이 이뤄진다. 사업부제는 은행의 영업을 본부에서 통합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부별로 독자영업을 통해 실적을 올리는 형태. 현재 이 사업부는 대부분 부행장급 임원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 행장이 부행장급 임원 세 명의 사표를 수리한 명분은 구조조정. 실적부진이 사표를 수리한 이유라는 것이다. 이후 김 행장은 이들 부행장들이 맡고 있던 사업부를 통폐합, 조직도 개편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이번에 사표가 처리된 김복완, 서재인 두 부행장의 ‘출신성분’이었다. 김 부행장은 김정태 행장의 고교 3년 선배이고, 서 부행장은 김 행장과 고교, 대학 동기다. 김 부행장은 지난 62년 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법학과에 들어갔고, 서 부행장은 김 행장과 같이 지난 65년 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에 나란히 진학했다. 김 행장으로서는 고교 선배와 동기를 자신의 부하로 뒀으니, 여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김 행장은 주택은행 출신이지만, 이 둘은 모두 국민은행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김 부행장은 지난 70년부터 국민은행에서 근무했고, 서 부행장도 지난 73년 국민은행에 입행한 것. 다만 함께 사표가 수리된 최범수 부행장은 외부 출신으로 국민-주택 갈등에서 한발짝 비켜서 있다.
예전 국민은행 출신인 한 관계자는 “김복완 부행장의 경우는 합병 후 영업본부장을 맡아 사실상 과거 국민은행 직원들 사이에서는 업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 수장으로 인식됐던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이쯤 되면 김 행장과의 불협화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이들 부행장이 퇴진하고 난 뒤 과거 국민은행 노조가 반발하고 나섰다.
현재 국민은행에는 주택과 국민은행이 통합한 이후에도 옛 국민은행 노조와 옛 주택은행 노조가 따로 조직돼 있다. 노조가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채 기존의 노조를 따로따로 인정하는 ‘병존 노동조합’이라는 형태인 것.
옛 국민은행 노조는 국민은행 출신 부행장들이 줄사표를 내자 ‘`국민-주택은행 합병 전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서까지 내는 등 김정태 행장의 인사조치에 강력 반발할 태세. 국민은행 노조는 여기에서 “이번에 단행된 부행장 세 명의 경질인사는 옛 국민은행 출신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옛 국민은행 노조의 한 관계자는 “과거 국민은행 임원을 희생양으로 삼아 마치 이들이 내부 조직의 갈등을 유발한 주체로 몰아가고 있다”며 “이 같은 인사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이번 인사는 김 행장이 국민은행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론과 스톡옵션 행사의 부도덕성 등에 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취한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행내의 모든 문제는 김 행장에게 제왕적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민은행 안팎에서는 이번 부행장 인사조치가 이뤄진 이면에는 최근 큰 파문을 일으켰던 ‘김정태 행장에 관한 투서사건’이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우리 뿐만 아니라 재경부, 청와대 등 정부 부처에 간혹 은행장들의 비리 내용을 담은 투서들이 익명의 이름으로 접수되곤 한다”며 “특히 합병된 곳의 경우에는 더욱 잦은 편”이라고 전했다.
사실 은행장의 비리내용을 담은 투서 사건은 비단 국민은행뿐 아니라 C은행 U은행 등에서도 있던 일이다.
김 행장의 경우 장기간 지병으로 입원했고, 퇴원 직후 이 같은 인사를 단행한 점으로 미뤄볼 때, 김 행장의 공석기간 동안 ‘김 행장 흔들기’의 투서가 많았던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한지붕 다른 가족’인 국민은행측의 반발에 대해 주택은행 출신들은 곤혹스런 표정이다. 옛 주택은행 노조 관계자는 “국민-주택이 대등 합병을 한 상황에서 이번에 국민은행측 인사만 경질됐다는 점에서 국민은행이 반발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며 “하지만 어차피 한솥밥을 먹는 이상 소모적인 갈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김 행장을 ‘제왕적 행장’인 것처럼 빗대는 것은 맞지 않다”며 “오히려 몇몇 부행장들이 월권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고 밝혀 옛 국민은행 임직원들과는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 행장의 강도 높은 조직개편에서 시작된 두 은행 출신 간의 불협화음은 노조뿐만 아니라, 행내 직원들로까지 번지고 있다. 옛 국민은행 출신 관계자는 “요즘 들어 행내에서 학맥, 인맥, 출신 은행 등 각종 끈으로 연결된 분열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