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원 SK(주) 회장이 지난 11월10일 최종건 창업주 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SK사태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 ||
최근 발간된 김광현 조선일보 독자서비스센터장(46)의 저서 <은밀한 게임>(조선일보사 간)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다. 이 책은 조선일보 경제과학부장, 경제담당 부국장 등을 지낸 김씨가 기자로 재직하면서 보고들은 취재기를 모은 경제비화록이다.
다음은 이 책에 나오는 눈길을 끄는 내용.
2003년 최대의 기업 스캔들을 꼽으라면 SK글로벌의 분식회계로 확대된 ‘SK사태’다. 이 사건은 SK 오너들의 지분 이동에 관한 단순 고발사건이 SK글로벌의 대규모 분식회계사건으로 확대되더니 급기야 SK그룹의 비자금사건으로 또다시 확대되는 등 재계는 물론 정치판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번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과거 SK가 유공을 인수할 때부터 동원됐던 자금 등 옛날부터 내려온 누적부실들이 원인이었다. 이 부실을 지난 98년 최태원 회장이 취임하면서 모두 해결해보겠다는 의욕에서 부실을 파악해 보고서로 정리해 올리라고 했다. 이것이 검찰 수사에 적발돼 결과적으로 ‘SK사태’로 커졌다.
또 멀쩡히 살아있는 재벌에 대해 사전 예고도 없이 검찰이 사무실로 들이닥친 것도 노무현 정권과 관계없는 검찰의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검찰개혁 운운하면서 단단히 검찰을 벼르고 있던 차에 검찰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SK를 기습한 이유도 2002년 대선 과정에서 SK가 유난히 이회창 후보측과 가까웠고, 정치자금도 많이 건넸다는 소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범케이스로 현 정부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SK를 골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선 ‘SK 덕분에 삼성이나 한화 같은 다른 재벌이 살았다’는 얘기마저 돌았다.
▲정치는 그래도 남는 장사다
뇌물 스캔들이 정치권과 재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영남 출신으로 DJ정권 시절 민주당 서울 강남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가 총선에서 낙선한 전성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당 한달 운영비만 최소 4천만원이다. 1년이면 5억원, 4년이면 20억원이 필요하다. 난 돈을 전혀 거두지 않고 내 돈만 썼지만 만약 마음만 먹었으면 한달에 5천만원은 너끈히 벌 수 있었다. 원외이긴 하지만 서울 전략지역의 여당 지구당위원장은 민원 해결사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국영기업인 한전이나 KT의 민원 한 건만 해결해줘도 한 달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아무리 원외이지만 우리 같은 전략지역구 위원장들이 전화하면 여권 실력자들도 안들어 줄 수 없다.”
비교적 깨끗하다고 소문난 한 젊은 현역의원은 “지역구 관리하면 1년에 6억원, 4년이면 24억원이 든다. 거기에 선거 때는 별도로 30억원에서 40억원이 더 들어간다. 국회의원들이 50억원 이상을 어디서 만드는가. 의원들이 국회 예결위 특위를 구성할 때 서로 계수조정소위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소위에서 지역구 예산을 늘리고 그렇게 자신들의 지역구에 민원사업을 배정받으면 관급공사를 발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최소한 5%는 리베이트로 받는다”고 말했다.
다른 한 젊은 야당 의원은 “초선 때는 힘이 많이 들지만 재선이나 3선쯤 되면 들어가는 돈보다 들어오는 돈이 더 많아 남는 장사가 된다”고 전했다.
▲ <은밀한 게임> | ||
DJ정부 초기에 ‘DJ측은 1976년 이후 LG에서 정치자금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LG에 대해 상당히 섭섭해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황한 LG측이 과거 기록 등을 조사해보니 한푼도 안 준 것은 아니고 과거 여당과 야당인 DJ측에 8 대 2 정도로 준 것으로 파악됐다.
그 결과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LG는 DJ정부 초기에 반도체를 현대에 빼앗겼다.
야당 시절의 DJ를 싫어했다고 알려진 한진그룹 역시 99년 집중 세무조사를 받아 5천억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당하면서 조중훈 회장의 아들 조양호 사장이 감방에 가는 수모를 겪었다.
DJ정부 시절에는 이 비율이 6 대 4 정도로 줄었다. 손길승 SK 회장은 최근 재계 고위 인사들과의 모임에서 “다른 그룹은 정치자금을 여당 60%, 야당 40%로 나눠 줬는데 우리는 DJ정부시절 민주당에 몽땅 주느라 한나라당에는 한푼도 못 줬다.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한나라당이 의원을 보내 형평성을 얘기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이 비등할 때라 앗 뜨거워라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못 준 돈을 합쳐 1백억원을 줬다”고 밝혔다.
▲권력 앞에 초라한 재벌 총수들
로비를 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 정권은 항상 방심할 수 없는 두려운 상대다. 검찰의 SK글로벌 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거대 재벌이라도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로비나 부패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재벌들이 얼마나 집권정부를 무서워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처음 미국을 방문했던 2003년 5월 미국에서 벌어진 일.
당시 미국에서 한 청와대 관계자가 이렇게 전했다.
“노무현 정부가 언제든 강한 재벌정책을 쓸 수 있다고 본 건지 굳이 안 와도 될 회장들이 줄줄이 따라왔다. 몇 년 전 수술 때문에 몸조심 해야 한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부터 앞장섰다. 청와대에서 기업인들은 가급적 수행원을 동반하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회장들 혼자서 모든 행사를 따라다니다 보니 회장들에 대한 대접이 말이 아니었다. 대통령 내외만 리무진이고 나머지 수행원은 모두 승합차를 타야 했다. 거구의 정몽구 회장은 승합차 따라다니면서 타느라 고생 많이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비좁은 문을 겨우 비벼 들어가면 봉고차 내부와 의자까지 좁아 지나가기도 앉기도 무척 불편했다. 9·11테러 기념지에선 대통령이 도착할 때까지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장시간 대기했다. 행사가 끝나면 자기가 타야 할 승합차를 놓치면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어 자기 승합차를 찾느라 헐레벌떡 뛰어다니는 총수들을 생각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