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차 “지나친 개인주의” vs 저연차 “독립성·편의성 보장“
2018년 방영한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판사들의 세상을 밀도 높게 그렸다. 이 드라마에서는 현재 시스템대로 부장판사가 큰 방을 혼자 쓰고 배석판사 두 명이 그 옆 방을 같이 사용했다. 사진=JTBC ‘미스 함무라비’ 홈페이지
#직급 무관하게 1인 1실
사법행정에 관한 상설 자문기구인 대법원 사법행정자문회의는 6월 1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앞으로 새로 짓는 법원청사는 모든 판사가 직급과 무관하게 같은 크기로 1인 1실을 사용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판사 직무의 실질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모든 판사들이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이는 최근 들어 젊은 법관들 사이에서 제기된 안건이기도 했다. 현재 판사들은 직급에 따라 방을 사용하고 있다. 합의재판부의 경우 부장판사 1명이 큰 방 하나를 쓰고, 배석판사 2명은 그 부장판사 사무실 옆에 딸린 방을 함께 사용한다. 법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단독판사들은 적으면 2명, 많으면 4명 정도가 사무실을 함께 나눠 사용하고 있는 구조다.
당연히 독방을 쓴 적이 없는 젊은 판사들은 1인 1실을 환영하고 있다. 현재 부장판사만 독방을 쓰는 구조는 수직적인 과거 조직 문화를 반영한다는 비판이다. 30대 초반의 한 판사는 “배석판사 2명은 한 방을 나눠 쓰는 것부터가 사실 합의부라고 하지만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며 “같은 규모의 방을 쓰는 것으로 바뀌면 수평적 조직문화 확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의 능률이 좋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30대 여성 판사는 “집에 가지고 가서 일을 처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무실에 혼자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억지로 저녁을 함께해야 하는 등 불편한 점도 적지 않다”며 “아무래도 혼자 사무실을 쓰게 되면 시간을 더 편하게 나눠 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판결문 작성 등 사건 처리가 더 효율적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최근 법원의 다양한 변화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부터 비롯됐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대법원 청사 전경. 사진=최준필 기자
#부장급 이상은 아쉬움 토로
하지만 부장급 이상 판사들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를 때 서로 물어가면서 하는 게 더 좋은데, 이런 문화가 사라지는 게 아쉽다”는 지적이다. 익명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배석판사 시절 2명이서 함께 사무실을 쓰면서 배우는 게 정말 많았다”며 “일처리 관련 모르는 것을 물어본다든지, 사건 관련 의견을 나누는 등 효율적인 부분도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
실제로 적지 않은 판사들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비슷한 연차의 배석판사들에게 자문을 구하곤 한다. 특히 같은 합의부에 있을 경우 새로 들어온 배석판사가 이미 사건 내용 등을 잘 알고 있는 판사에게 물어가면서 적응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다른 방을 쓸 경우 소통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다.
법원 내 개인주의 확산으로 보는 시선도 나온다. 30대 중반의 한 남자 판사는 “경력법관들이 채용되면서 기수를 중심으로 뭉치던 법원 내 분위기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다”며 “1인 1실은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고 싶다’는 개인주의가 드러난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너무 빠른 변화가 아쉽다는 목소리도 있다. 40대 후반의 판사는 “저연차 판사들도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개진하는 등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되는 부분도 반영된 게 1인 1실인 것 같다”며 “젊은 판사들이 과거 위계질서를 바꾸자고 하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그로 인해 젊은 판사들과 나이 든 판사 사이에 벽이 생긴 것 같은 문화는 아쉽다”고 설명했다.
#고등부장 승진 폐지부터 변화 계속
사실 이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부터 비롯됐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승진제도 폐지와 함께 모든 판사들이 동등한 위치가 되면서 ‘연차 등에 상관없이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법원 관료화의 문제 배경으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지적하고 폐지를 추진해 왔다. 그리고 지난 3월에는 승진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법원장이나 대법관으로 가는 필수 코스이기 때문에 ‘법관의 꽃’으로 불려왔는데, 승진을 위해 윗선의 눈치를 보는 등 법관의 서열화를 부추겨 재판의 독립을 해친다는 지적에서부터 비롯된 결정이었다.
독립된 개별 판사들에 대한 동등한 대우는 이뿐이 아니다. 자문회의에서는 비슷한 취지로, 앞서 지위·기수·경력 등에서 큰 차이가 없는 판사들로 구성돼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구분 없이 재판장을 교대로 맡도록 하는 ‘경력대등재판부’를 확대하라는 제언도 나왔다.
이에 대해 앞선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승진제도가 폐지되면서 열심히 일을 해서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사라지다보니 근무 동력이 사라진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며 “많은 직장인들의 승진 희망 이유 가운데 하나가 더 넓어진 사무실을 홀로 쓴다는 점이지 않나. 최근 정책 방향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열심히 일해야 할 동기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현재 시스템은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