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리즘 수호자 사마란치와 ‘맞짱’
▲ 1986년 11월 몬테카를로 GAISF 총회에서 토마스 켈러 회장(오른쪽)이 필자에게 회장직을 인계했다. |
켈러는 스위스인으로 1989년에 국제경기연맹(GAISF) 본부가 있던 모나코의 허미티지(Hermitage) 호텔에서 65세를 일기로 객사했다(1924년 생). 아무 소식이 없어 방에 들어갔더니 사망해 있었다 한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는 아무데나 소금을 한 모금씩 수북하게 뿌려 먹었다. 한번은 보기가 딱해서 너무 소금을 많이 먹으면 혈압에 나쁘다 했더니 남의 식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늘 누구나 갑자기 사망할 수도 있기에 늦기 전에 자기 일을 이어 받을 수 있는 후계자를 키워놓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를 회고하려고 하니 새삼 그 말이 생각난다.
그는 원래 스키선수였지만 조정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56년 멜버른올림픽의 대표선수로 뽑혔다. 그런데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대한 항의로 스위스가 불참하기로 결정했다가 번복하는 와중에 시기를 놓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스포츠행정가로 돌아선 그는 최연소 국제스포츠연맹 회장이 되었다. 34세에 국제조정연맹 회장이 되어 1989년 사망 때까지 31년간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와 함께 GAISF 회장직도 1986년에 필자가 당선될 때까지 16년간이나 수행했다. 켈러는 부룬디지 IOC 위원장 시절 스위스의 두 번째 IOC 위원 선출에 추천되었지만 부룬디지 위원장은 가프너(Gafner)를 지명하고 켈러를 뽑지 않았다.
필자가 켈러를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10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4일간 개최된 국제경기연맹(그때는 GAIF) 총회에서였다. 1976몬트리올올림픽에 대한 준비 차 열린 중요한 총회였다. 이때 조정 회장이었던 켈러가 GAIF 회장, 역도 사무총장이었던 오스카 스테이트(Oscar State)가 사무총장이었고, 이 총회기간 중 영국의 찰스 파머(Chales Palmer·유도 회장)가 사무총장이 되었다.
당시 필자는 태권도의 세계화에 여념이 없었다. 73년 5월 세계태권도연맹(WTF)이 필자가 건립한 국기원에서 창설되었고, 75년에 제2회 WTF 총회와 30개 팀이 참가하는 제2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세계태권도연맹은 그때까지도 국제기구의 공인을 받지 못한 임의단체였다. 75년 제2회 세계선수권에 스테이트 사무총장과 미국올림픽위원회 필 크룸(Phil Krumm) 위원장 내외를 초청했다. 스테이트 총장 권유로 GAIF 가입신청서를 냈고, 당연히 필자는 GAIF 총회에 이종우 WTF 사무총장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이때 4일간 총회는 올림픽, 비올림픽, 전종목 국제연맹이 모여 하루는 총회, 하루는 올림픽시설 시찰, 하루는 각 그룹별 회의, 그리고 마지막 날 다시 총회 순으로 진행되었다. 총회 첫날, 태권도의 가입문제가 상정되었고 쉽게 통과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상정이 되자마자 파머(유도), 헤닝(수영) 회장들의 반대로 격론이 2시간이나 걸렸다. 이때는 한 연맹만 반대해도 가입이 안 될 때였다.
태권도는 가라테의 한 유파다 하는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고, 또 ITF(국제태권도연맹)라는 다른 태권도 국제단체가 하나 더 있으며 거기에서도 최홍희 이름으로 가입이 신청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스테이트 총장도 여론에 밀렸고 그 이상 진척이 없자 야속하게도 켈러 회장은 총회 마지막 날에 토의하자며 연기시켜 버렸다. 덕분에 개인적으로 사흘 동안 잠도 못 자게 되었다.
결국 2시간 토의 끝에 켈러 회장이 가입시키는 방향으로 유도하여 만장일치로 WTF의 GAIF 가입을 결정했다. 이때 연맹에 자금이 없어 필자는 사비로 몬트리올에 갔었다.
켈러와는 그러한 인연으로 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켈러 회장에게 가입시켜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더니 자기가 시간을 끈 것은 절대적으로 충분한 토의가 있기를 기다렸다가 가입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소한 태권도가 세계화의 길을 성공적으로 갈 수 있게 도와준 것이었다.
국제경기연맹은 77년에 본부를 레니에(Rainier) 대공의 재정지원(사무실 무료대여 등)을 조건으로 모나코로 옮겼다. 그리고 명칭도 GAIF에서 GAISF로 바꿨다. 즉 General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이 된 것이다.
국제경기연맹은 올림픽을 관장하는 IOC, 자국 내 올림픽 운동을 관장하는 각국 올림픽위원회(NOC) 그리고 자기종목의 최고 통괄 단체인 국제연맹 등 3개의 지주 중의 두 번째 지주로서 확고한 IOC의 기술적 동반자였다. GAISF는 하계올림픽종목연맹, 동계올림픽종목연맹, 기타연맹(비올림픽과 복합단체)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었지만 각자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스포츠발전을 위한 공동노력을 한다는 목적으로 모나코에 사무국을 두었다.
스포츠는 선수들을 위한 것이고 선수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켈러의 지도 이념은 밑(Grass-root)에서 위까지 평생 스포츠에 몸을 바쳤다는 자부심이 그 밑바탕이었다. 하지만 약점은 IOC처럼 경기(Game)를 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원이 없는 국제회의기구라는 약점이 있었다. 여비도 각자 부담이고 매년 연맹별로 회비를 냈고 기부금도 없었다.
사마란치가 올림픽운동이라는 말을 쓰면서 올림픽가족의 단합을 유도하려고 시도할 때였다. 올림픽운동을 수없이 강조한 사마란치의 연설이 끝나자 켈러 회장이 포문을 열었다. “위원장님, 올림픽운동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지금도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대놓고 면박을 준 것이다. 옆에서 ‘큰일 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지켜보고 있으니 당황한 사마란치는 내색은 안 했지만 얼굴이 빨개지더니 참는 듯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함께 올림픽 운동의 뜻을 찾고 추진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나를 도와주어야 합니다”하고 서둘러 끝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는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 직후라 IOC는 무력해지고 국제연맹의 존재감이 높아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켈러는 올림픽은 IOC지만, 스포츠는 각 종목 국제연맹이 통괄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는데 ‘IOC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한 사마란치와 충돌했고, 결국 IOC가 최종적으로 완승을 거둔다.
2010년 1월 18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인터뷰 ‘시대의 증언’에서 사마란치는 “IOC를 위해 GAISF를 죽여야 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사마란치는 GAISF를 하계종목연맹(ASOIF) 동계종목연맹(AWIF)로 분할했고, 올림픽 수익금을 직접 배당하기에 이르렀다. 돈줄을 쥔 IOC의 이러한 조치에 GAISF는 무력해졌다.
GAISF와 IOC의 갈등은 필자가 GAISF 회장이 되면서 해소됐다. GAISF는 두 번째 지주, 즉 기술적 동반자로 IOC와 평화는 유지했지만 사마란치의 견제와 감시는 계속되었다. 또 사마란치 직계인 네비올로(Nebiolo) 육상 회장이 ASOIF 회장이 되어 GAISF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1년 바덴바덴에서 우리가 서울올림픽 유치에 열중하고 있을 때 켈러는 스탈배드(Stahlbad)라는 식당에서 마리오 바스케스 NOC 회장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정주영 회장과 필자도 노르웨이의 스타우보(Staubo) 위원과 저녁식사를 하러 가 조우하게 됐다. 아무도 서울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때였는데 켈러는 필자 보고 서울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해주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81년 4월 로잔 팔레스호텔에서 있었던 IOC 국제연맹연석회의에서 켈러는 나고야유치위는 와서 계획을 설명했는데 서울은 회신도 없다며 자격박탈을 사마란치에게 건의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후 켈러 회장을 서울로 초청했다. 그는 막강한 GAISF 회장이고 조정연맹 회장인 데다 시간계측을 다루는 스위스 타이밍 사장이어서 이 방문은 큰 의미가 있었다. 방문기간 중 국기원에 초청해서 그에겐 낯선 태권도도 보여주었는데 별로 말이 없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조정경기장 위치 선정인데 켈러가 까다롭다하여 필자가 스위스 취리히까지 가서 오도록 했다. 이때 LG가 조정을 맡고 있었다. 경기장 후보지로 한강하류 오물수거장을 치워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같이 갔는데 켈러는 보더니 도저히 안 된다 하여 제2 후보지인 아산만에 갔다. 여기도 바람이 많이 불었고 근처에 위락시설도 없어 안 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의 미사리경기장을 최종 낙점했고, 올림픽 조정경기와 카누를 멋지게 치러냈다. 지금도 경정은 물론 시민들의 나들이 명소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1986년 GAISF 총회에서 켈러는 GAISF 회장직을 필자에게 넘겨주고 국제조정경기연맹에만 전념했다. 지금도 조정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Thomas Keller medal이 매년 최고상으로 주어진다.
‘스포츠는 스포츠를 하는 선수를 위한 것이고 그들이 주체다’라는 철학 하에 모든 국제연맹이 스포츠의 장래와 문제를 협의하던 공동체였던 GAISF는 소멸했다. 최근에 서울에 들렀던 영국의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가 얼마 전 Sports Accord 회의에 참석하려고 출입증(Accreditation)을 신청했더니 1500달러를 내라고 통지가 와서 안 가고 항의편지를 보내기로 했다고 했다. 기자의 신분출입증이 1500달러라는 것인데 기가 차다는 것이다. 결국 스포츠가 돈벌이가 되고 있어 지하에 있는 켈러가 울 지경이 된 것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