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또 한 달이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2020년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우리 삶 전체를 헝클고 위협한 해이기도 했다. 거기서 우리는 지금껏 우리가 당연히 누려왔던 날들이 내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돌이켜 그날이 그날이라고 심심해했던 그 일상이 축복이었음을 고백하면서 또 오늘의 축복을 놓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나는. 변화무쌍했던 2020년은 당신에겐 어떤 의미였는지.
이주향 수원대 교수
엄마의 시신을 땅에 묻고 돌아와 문득문득 마음이 선산으로 향했다. 넋을 놓은 마음은 작은 자극에도 예민해지는 법이어서 내 한숨에도 반응했다. ‘엄마가 답답하면 어떡하나’라며 울면서 한숨을 토해내기도 했고, 바람이 매서워지면 ‘엄마가 추우시면 어떡하나’ 걱정하기도 했다. 모든 대·소사를 접고 묘막을 지켰던 옛 선인들의 삶의 방식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슬프면 울어야 하고, 아프면 앓아야 하는 것이므로.
어느 날 이가 아파 치과에 갔더니 한 이의 뿌리가 죽었다고 한다. 이빨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또 처음으로 전기충격이란 걸 받았다. 멀쩡한 이빨은 작은 충격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죽은 이의 뿌리는 충격을 높여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속상하면 속상할 수도 있을 그 일이 묘하게도 안도감을 주었다는 점이다. 죽은 것에는 감각이 깃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큰 위로가 됐을까. 나는 생각했다. 엄마는 춥지 않다. 엄마는 답답하지 않다. 엄마는 거기, 선산에 없다. 엄마의 시신은 엄마가 아니다. 엄마의 시신이 엄마가 아니라는 생각이 깨달음이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혼이 떠난 몸은 어쩌면 깎아놓은 손톱처럼 아무 것도 아닌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몸엔 더 이상 그녀가 없었다. 그러면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티베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죽음은 없다. 죽음은 단지 영혼이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영혼은 몸을 따라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원, 모든 것의 근원자리다. 우리의 몸이 영혼을 잊고 감각에 놀아나면서 길을 잃는 이유는 겁의 세월을 윤회하며 익혀온 집착과 증오심 때문이란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끌리거나 질투하거나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근원자리를 잊고 에고를 강화시켜 왔다.
그러면 어떻게 그 근원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집착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찾아들면 그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감정이 일어나는 마음에 대해, ‘나’에 대해 되묻는 것이다. 지금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일으키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라고. 그러면 묘하게도, 일어난 감정을 TV 보듯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감정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감정은 일어났지만 감정 자체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된다.
물론 집착 혹은 증오심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면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죽을 것처럼 아팠겠는가. 죽을 것처럼 아팠던 이유는 집착이 깨지고 에고가 깨지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고,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리라. 알을 깨고 나오는 일은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일이기에 죽음의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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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