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천사라뇨? 오디션 거친 실력파랍니다
폴란드 태생의 폴라(60)는 1파운드(약 1770원)짜리 동전을 바닥에 펼쳐진 검은색 가방 안에 넣었다. 라이트는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밤 늦도록 공연하는 걸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예술가는 힘든 직업인 것 같아요.” 폴라의 말이다.
▲ 한 여성이 로버트 블루스맨 앞에 놓인 가방 안에 동전을 넣고 있다. |
1시간이 지나 밤 12시 10분께. 라이트는 그린파크 역에서 지하철 막차를 타고 약 20분 동안 이동한 끝에 런던 북부의 한 역에서 내렸다. 약 7분을 걸었다. 그가 혼자 사는 3평 남짓한 원룸의 바닥에는 재즈와 인도 관련 서적, 악보 등이 옷가지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아들 한 명과 부친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라이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지금 아들은 대학에 다닌다. 이때보다 많이 컸지만 얼굴은 그대로다.” 라이트는 아이들과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난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과 딸 2명은 ‘전’ 여자친구이자 그들의 친모가 사는 런던 북부 집에서 살고 있다. “내일 아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 공연하며 번 돈으로 아들 맛난 것을 사줄 생각이다.”
매번 ‘비싼 것’을 사줄 수 없는 듯했다. 라이트는 주 5일 동안 40시간 정도 공연하며 하루 25~40파운드를 번다. 그의 한 달 방값은 세금을 포함해 600파운드 정도(약 106만 원)인데, 지하철 공연 수익만으로 생활이 벅차다. 그래서 부업으로 결혼식장이나 이벤트 행사에서 색소폰을 분다. “공연할 때마다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 든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후회한 적은 없다.”
라이트와 비교하면, 64세의 존 스노우는 기력이 많이 쇠해 보였다. 스노우는 런던 지하철 워털루 역 등에서 색소폰을 연주하지만,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귀가한다. “사실 음악에 재능이 전혀 없다. 어린 시절 꿈은 치과의사였고….” 그는 런던대학교(UCL)에서 고대문헌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영국 브리스톨 지역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했다. 1969년 자신의 슈퍼마켓에서 ‘재즈 잡지만’ 구입하던 손님과 친해진 것이 색소폰에 입문한 계기였다. “(손님은) 색소폰 주법을 무료로 가르쳐주는 스승이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술집에서 공연을 했다.” 스노우는 공연 도중 자주 색소폰을 입에서 떼었고, 그럴 때마다 음은 힘없이 끊겼다. 가방 안에 놓인 동전을 헤아리니 10파운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나이에 직업이 있다는 게 행운이다”고 그는 말했다.
# “오늘 공연이 역대 최고다”
영국 정부는 2003년부터 런던 지하철 역 안 공연을 정식으로 허가했다. 그해 초부터 런던 중심가에서 시위를 하며 공연 합법화를 외치던 악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하철 공연은 코카콜라 등 대기업이 후원하고 영국 교통당국(TfL)이 운영한다. 매해 교통 당국이 주최한 오디션을 통과한 270여 명의 악사가 24개 역 안에 걸쳐 마련된 36개 장소에서 음악적 재능을 뽐낸다. 오디션 지원은 16세 이상의 ‘음악인’이면 누구든 할 수 있고, 지난해 한 차례 있던 오디션에는 700여 명이 지원해 80명이 선발되었다. 면허증은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데, 당국에서 공연 기록 등을 감안한다.
‘예약’ 없이 불법 공연을 했다가, 면허 갱신 때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매주 화요일 오전마다 악사들은 교통당국에 전화를 걸어 ‘한 주’ 공연장소와 시간을 예약한다. 수익이 좋은 런던 중심가 역에서 공연을 잡으려고 전화가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통화가 힘들다. 힘들뿐더러, 연결 중일 때도 요금이 정산된다. 연결이 안 돼 예약을 못할 때도 있다. 40대에 하모니카를 부는 한 악사는 “(교통당국은) 악사들을 예술가로 보지 않는 데다 악사들의 궁핍한 처지를 이해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런던 지하철 승객은 하루 350만 명으로 추정된다.
▲ 저녁 무렵, 런던 중심 피카디리 서커스 역 안에서 외팔이 기타리스트가 연주하고 있다. |
블루스맨은 단순히 베끼는 게 아니라, 음악을 재해석하는 수준이었다. “게리 무어의 블루스와 한번 비교해보라.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 그의 블루스 연주는 게리 무어의 원곡보다 선율이 장엄했다. 이탈리아에서 여행 온 안드레이(19)는 런던 워털루 역 안에서 3분 동안 멍한 표정으로 블루스맨를 바라봤다. “저도 기타를 쳐봤지만 저 악사는 대단한 실력파입니다.” 블루스맨은 주 6일 동안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공연하며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려고 노력한다. 저녁마다 집에서 2~3시간씩 연습한다. 그는 날마다 같은 음악이라도,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다. 수익은 불법이던 시절보다 적지만, 연주 실력이 발전한다는 보람으로 살아간다. “오늘 공연이 역대 최고다. 내일 공연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 “나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았다”
마이클 도허티(51)도 통기타를 치지만, 주로 고전 음악을 연주한다. 그가 ‘소나타’를 연주하자, 사람들이 붐비는 퇴근길 역 안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스산했다. 그의 하루 수익이 궁금했지만, “수익은 악사들 사이에서 비밀이다”는 답변을 들었다. 또 “(수익을) 얘기한 악사가 있다면 악사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를 깬 것이다”고 말했다.
저녁 8시께, 런던 북부에 있는 도허티의 원룸을 찾았다. 도허티는 3평 남짓한 방 안에서 대마초를 피웠다. 대마초를 처음 피운 건 14세 때고, 그해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 공연을 시작했다. 도허티는 “나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성공한 것이다”고 말했다. 처자식이 없는 그의 공연 수익이 궁금했다. “대부분 여행 비용으로 쓰인다.” 올해 초 처음 간 인도는 환상적이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악사와 즉석에서 밴드를 결성해 공연을 했다. 공연을 제재하는 경찰은 없었고, 대마초도 방이 아닌 ‘거리’에서 피웠다. “예술가라면 인도에 가볼 만하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이탈리아 태생의 악사들도 만났다. 그레이스 솔레로는 그린파크 역 등에서 통기타를 치며 컨트리 음악을 불렀다. 그는 “이탈리아는 음반 시장이 상업적으로 변질되었고, 엇비슷한 음악들이 판을 친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파비오 테디(34)는 지하철 공연을 가장 선호한다. 그는 실내 콘서트장과 거리 등에서 공연을 해왔다. 지하철은 공기가 탁하고 부산한 데다 돈벌이도 시원치 않지만, 음악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철에는 워낙 바쁜 사람이 몰리다 보니 음악을 유심히 듣지 않는다. 콘서트장과 달리 관객과의 소통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는 나만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 “인터뷰는 죽어도 안 한다”
어디든, 명당은 있게 마련이다. 악사들은 수익으로 가장 좋은 곳으로 ‘피카디리 서커스 역’을 꼽는다. 피카디리 서커스 지역은 인근에 관광지와 직장이 몰려 있다. 영국 록을 부르는 그램(41)은 “(피카디리에서) 주말이면 하루 90파운드 정도 번다”고 말했다. 명당이긴 하지만, 악사들은 공연시 시간대를 고려해야만 한다. 나른한 오후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즐길 만한 영국 밴드 오아시스의 ‘원더월’을 부를 수 없다. 그램은 “괜히 시끄럽다고 항의받을 일이 있나. 오후에는 영국 밴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 등 잔잔한 노래를 부른다”고 말했다.
취재 도중 가장 열렬한 호응을 얻은 악사도 피카디리 역 안에서 만났다. 저녁 6시께, 남색 색안경을 쓰고 앞 머리카락을 모두 세운 한 남성이 전자 기타로 록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팔은 절반가량이 없었다. 오른쪽 팔꿈치 부위에 착용한 기구로 손가락을 대신해 기타줄을 건드렸다. 10대 무리가 지나가며 환호했지만, 그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의 가방 안에는 동전들이 반짝거리며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4시간 동안 연주하면서 그는 자리 한 번 비우지 않았다. “죽어도 안 한다. 그냥 가세요.” 거듭 부탁해도 외팔이 기타리스트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가 원하는 건 인간적 동정이 아니라 음악적 찬사인 듯했다.
글·사진=이승환 영국 통신원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