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 때마다 문서 위조 내부통제 구멍, 역대급 실적에 찬물…“도피 안한 자신감, 업무 관련자 위주 수사해야”
우리은행 본점 기업개선부에서 근무하던 A 씨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회사 돈 총 614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다. 횡령금은 옛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에 참여했던 이란의 가전업체 엔텍합으로부터 받은 계약보증금으로, 2011년 계약이 불발되면서 매각 주간 은행이었던 우리은행이 특별관리계좌에 보관 중이었다. 이후 엔텍합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 승소하면서 계약금을 반환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나서야 A 씨의 범행이 발각됐다.
무려 10년 만에 횡령사실을 알게 된 우리은행은 4월 27일 A 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이튿날 A 씨는 직접 경찰서를 찾아 자수했고 뒤이어 동생 B 씨도 함께 구속됐다. 경찰은 전체 횡령금 가운데 500억 원가량은 A 씨가, 나머지 100억 원가량은 동생 B 씨가 쓴 것으로 보고 있다. B 씨는 이 가운데 약 80억 원을 해외 골프장 리조트 개발 사업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다고 진술하고 있다.
#유령회사에 600억 원 송금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횡령을 할 때마다 은행 내부 문서를 위조해왔다. 2012년과 2015년에는 부동산 신탁 전문 회사에 돈을 맡겨 두겠다며 관련 문서를 만들어 윗선의 결재를 받았고 인사이동을 앞둔 2018년에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계약금을 관리하기로 했다는 문서를 임의로 작성해 승인을 받았다. 계약금은 캠코의 산하 특수목적회사(SPC)에서 맡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사실 이 회사는 동생 B 씨가 설립한 유령회사였다. 우리은행은 3번 다 A 씨의 말을 믿었고 600억 원은 고스란히 B 씨의 법인 계좌로 송금됐다.
신뢰가 생명인 금융권은 머쓱해졌다. 오스템임플란트 사태 때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금융권 관계자는 “제1금융권은 신뢰가 생명이다. 책임 측면에서는 오스템임플란트와는 비교할 수 없다. 국민들이 금리가 별로 높지 않아도 다른 곳이 아닌 제1금융권에 돈을 맡기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며 “6년 동안 우리은행이 관리하던 돈을 갑자기 캠코가 맡게 됐다고 했을 때 누군가 크로스체크만 했어도 ‘횡령 시도’로 끝났을 사건이다. 그런데 10년 가까이 이상한 점을 못 느꼈다는 건 결국 은행권에서조차 내부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우리은행이 고인 물을 방치해 썩게 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익명을 요구한 우리은행 영업점 직원은 “뉴스를 보고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한 자리에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다고?’였다. 보통의 직원들은 업무가 손에 익을 만하면 주기적으로 부서나 영업점이 바뀐다”고 말했다.
실제로 A 씨는 2011~2018년과 2020~2022년 두 차례에 걸쳐 10년 가까이 본점 기업개선부에서 근무했다. 금융감독원을 포함한 금융권은 다른 업계보다 철저하게 순환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한 부서에서 오래 일하면 자금 운영 방식과 속사정을 잘 알게 되고 나쁜 마음을 먹게 되는 건 한 순간인 까닭이다. 시중은행 직원들이 순환근무제에 따라 한 부서에서 3~4년 정도 머문다는 것을 감안하면 A 씨의 인사는 통상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A 씨는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까지도 기업개선부 소속이었다고 한다.
명령휴가제를 제대로 시행했냐는 비판도 나왔다. 명령휴가제는 금융사고 발생 우려가 높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임직원을 대상으로 회사가 일정 기간 휴가를 명령하고, 이 기간 동안 휴가자의 금융거래 내역, 업무용 전산기기, 책상 등 사무실 수색을 실시해 업무수행 적정성을 들여다보는 제도다. 금융사에서 발생하는 직원들의 횡령 사건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금융위원회가 2016년 입법해 증권사와 은행 등 금융사에서 시행되고 있다.
반면,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내부감시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부분은 대단히 아쉽지만 단순히 순환근무를 안 해서 생긴 문제라고 예단하기는 어렵다”며 “우리은행이 계약금을 맡게 된 시기와 A 씨의 최초 횡령 시기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돈이 들어오자마자 횡령을 시도했다는 말이다. 본인은 그 부서에 온 지는 1년도 안 됐던 시점이었다. A 씨가 해당 부서에서 오래 일한 것이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기업 매각 등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의 경우 대체인력이 부족한 경우가 더러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범행 후에도 퇴직 안한 이유가…
우리은행 직원들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허탈해 하는 분위기다. 23년 만에 완전민영화를 달성한 우리은행은 2021년 역대급 실적으로 성과급 잔치를 연 데 이어 올해 1분기 실적도 좋아 직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다고 한다. 여기에 올 3월 이원덕 행장이 취임하면서 플랫폼 강화와 인재육성에 대한 기대감도 높은 상태에서 600억 원 횡령이라는 폭탄이 터진 것이다. 심지어 이 행장은 횡령사고 당시 내부회계책임자였다.
익명을 요구한 우리은행 직원은 “어려운 상황에도 좋은 실적을 내어 적지 않은 성과급을 받았고 새 은행장님의 인재 육성 방침에 관심도 많았다. 다들 열심히 해보자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엔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설령 횡령한 돈을 전부 찾는다고 해도 이와 무관하게 엄벌에 처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한 탕 하고 감옥 가면 된다’는 식의 범죄가 또 나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A 씨 형제가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린 뒤 자수했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다.
경찰은 5월 6일 A 씨 형제를 구속 송치하고 공범 C 씨를 추가로 구속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C 씨는 2003~2009년까지 우리금융그룹 자회사와 우리은행 본점의 전산업무를 하며 A 씨와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주식 관련 전업투자자로 일했고, A 씨가 횡령한 돈 일부를 파생상품 가운데 하나인 옵션거래에 투자할 때 차트 매매신호를 알려주는 등 도움을 준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계속해서 횡령 자금의 흐름을 추적해 피해금 회수에 주력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다만, 아직까지 피해금을 얼마나 회수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마지막 횡령 시점에서 시간이 상당 부분 지난 데다 A 씨의 진술처럼 일부는 실제 주식에 투자한 정황까지 발견된 까닭이다.
이에 대해 전직 경찰 관계자는 “오스템임플란트 사건의 경우 횡령범이 약 8개월에 걸쳐 횡령을 했는데 그 사이에 대부분은 주식투자로 날렸고, 남은 돈으로는 금괴와 건물을 샀다. 이번에는 4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조직적인 공범도 나왔다. 게다가 실제 주식 투자도 상당 부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령회사까지 세울 정도로 치밀한 성격이므로 다 써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주목할 점은 범행 이후 도피나 잠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인이 있는 돈이므로 언젠가 발각된다는 사실도 알았을 텐데 범행 이후 계속해서 회사를 다닌 것으로 보아 관련 정보에 대해서는 본인에게 가장 먼저 들어온다고 장담했던 것 같다. 업무 관련자 위주로 수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