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인자 바둑고향 자존심 세웠네~
▲ 광주광역시장배 전국 아마추어 바둑대회 전경. 참가자가 600명이 넘는 성황을 이뤘다. |
호남은 한국의 기향(棋鄕), 바둑의 고장이다. 우리 바둑의 큰 봉우리들 대부분이 거기에 있다. 광주를 중심으로 왼쪽 목포-영암에 조훈현 9단이, 남쪽 강진에 김인 9단이 있고 조금 떨어진 전북 전주-부안에는 한국 바둑의 아버지 조남철 9단과 살아있는 전설 이창호 9단이 있다. 조훈현 9단은 선대의 고향은 영암이나 출생지는 목포다.
광주에 전국 규모 아마추어 바둑대회가 생겼다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히, 바둑의 본고장 중에서도 중심이니 으레 있겠거니 했는데 아직 없었고, 그러다가 비로소 이번에 생겼기에 뉴스다.
딱 집어 광주에는 김인 조훈현 이세돌 같은 봉우리가 없다. 그러나 현역 프로기사만 17명, 작고한 프로기사까지 합하면 20여 명이 광주 출신이다. 현역 프로기사로는 맨 앞에 올드 팬들에게는 ‘무등산 검객’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오규철 9단(59)이 있다.
오 9단을 필두로 광주에는 중견 공병주 4단(41), 이창호 9단과 동갑으로 젊은 기사들의 오피리언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양건 9단(36), 차세대 선두주자 그룹의 18세 박정환 9단, 스물두 살의 김지석 7단, 요즘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는 백홍석 8단(25)이 있다.
거기다 특유의 강완으로 종종 일을 저지르는 온소진 6단(25), 데뷔 초기 신예 중에서도 대표로 활약하고 이후 잠깐 뜸했다가 다시 떠오르고 있는 김수용 4단(21)과 윤찬희 3단(21), 젊은 다크호스로 지목받고 있는 조경호 3단(22), 형제 프로기사로, 각각 2007년과 2009년에 입단, 나이도 입단도 2년 터울이며 일찌감치 한국리그 멤버, 이른바 ‘한국리거’로 뛰면서 각광받고 있는 신예 류동환 2단(22)과 류민형 2단(20), 그리고 올해 입단한 김성진 초단(22)과 박민규 초단(17)이 광주 출신이다. 막내 박민규 초단이 어린 나이여서 특히 주목의 대상이다. 주변에서는 박정환처럼 죽죽 성장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럴 만한 기재여서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
이들뿐 아니다. 여자 프로기사가 셋 있다. 강승희 2단(31)과 이영주 초단(21), 최정 초단(15)이다. 강 2단은 현재 독일에서 바둑을 사랑하는 독일인 남편과 살며 한국 바둑의 유럽 보급 전진기지를 자임하고 있는 윤영선 8단(해외보급단) 또래. 어느덧 고참이고, 2단 중에서는 남녀 합해 서열 1위다. 몇 년 전까지 윤영선 8단과 함께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을 돌면서 해외보급의 길을 모색했으나 요즘은 유럽은 윤 8단에게 맡기고 돌아와 국내 활동을 재개했다.
15세 소녀 최정 초단은 이미 유명인사. 지난해 입단한 새내기인데, 입단하자마자, 지난해 올해 연거푸 ‘남자 시니어 대 여자 기사 연승대항전’인 지지옥션배 여자팀 선수로 픽업되었다. 작년엔 다소곳했다. 팬들에게 처음 인사드리는 무대여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인사는 한 번으로 끝났다는 듯, 1번 타자로 등장해 무려 8연승, 여덟 명의 남자 기사들을 단숨에 쓰러뜨렸다.
▲ 광주광역시장배 전국 아마추어 바둑 대회 시상식. |
이영주 초단은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 입단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아마 시절이던 2007~8년 제35기 여류국수를 지냈고, 일본에서 열린 제21회 세계 남녀 페어대회에서 우승했다.
1982년, 열두 살 때 일본에 건너가 84년 입단한 후 98년에 9단이 되고 99년에 조치훈 9단으로부터 제54기 ‘본인방’을 넘겨받았던 조선진 9단(41)도 광주 출신이다.
프로기사가 많다는 것은 토양이 비옥하다는 뜻이다. 광주 인구 140만. 인구로는 전국 순위에서 좀 밀려 있으나 바둑에 대해서만은 양과 질에서, 자존심에서는 뒤질 마음이 없다.
2000년대 초입에 한국기원에서 바둑 체육화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일 때 광주에서만 10만 서명이 올라갔다. 바둑교실이 40여 곳. 바둑교실의 현재 추세를 볼 때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사실은 자존심이 좀 상해 있었지요. 다른 지방 바둑팬들이 부러웠고, 자격지심인지 몰라도, 그 분들이 우리에게 아니, 바둑의 고향이라면서, 프로기사를 그렇게 많이 배출했다면서 남들이 다 하는 아마추어 대회는 하나도 없냐. 그렇게 좀 웃는 것 같았거든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빌리자면 불편한 진실이었다고나 할까요. 이제 짐 하나를 던 기분입니다. 올해는 회계연도 때문에 예산이 많지 못했지만, 내년부터는 더 크게, 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대회로 선보이겠습니다.” 이번 대회의 산파 가운데 한 사람 정찬근 광주바둑협회 정찬근 전무이사(49)의 얼굴이 밝다. 정 전무는 대한바둑협회 산하 전국 16개 시도지부 전무이사협의회 총무이기도 하다.
강운태 광주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광주바둑협회 고경주 회장(54·금강기업 대표이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회장을 맡은 지 6년째라는데 그동안 광주 바둑을 위해 매년 5000만 원 정도의 사재를 희사했다는 것. 물질 있는 곳에 마음 있고, 그 마음이 구심점이 된다. 수십 년째 광주 바둑을 지원하고 있는 이기행 수석부회장(49·문성중고 행정실장), 보이지 않는 후견인 김재곤 자문위원(56)도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 힘을 합해 광주시를 움직였다.
프로기사는 왜 광주 출신이 많을까. 처음에는 우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이 한두 번 거듭되면 관성이 되고, 전통이 된다. 광주에 아마추어 대회가 없었다는 것은 대장간에 뭐 없다는 식 아닐까. 너무나 당연했기에, 누군가 했거나 할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제 코를 뚫은 걸 축하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번 대회 창설을 계기로 전북의 전주-부안, 전남의 목포-영암-신안-무안-강진을 둥그렇게 엮는, 바둑 벨트의 허브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