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선상의 삼각관계’ 다시 주목
▲ 살해설이 제기돼 온 나탈리 우드의 죽음이 30년 만에 재조사에 들어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한 장면. |
미신에 집착했던 나탈리 우드의 어머니는 어린 딸을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갔다. 이때 점쟁이는 ‘검은 물(dark water)’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했다. 불행하게도 이 예언은 적중했고, 그녀는 그렇게 검은 물속에서 사라져갔다. 러시아 이민자 부모를 둔 나탈리 우드(본명 나탈리아 니콜라에브나 자칼렌코)는 1938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어린 딸을 배우로 키우기 위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5세에 단역으로 데뷔한 그녀는 9세 때 출연한 <34번가의 기적>(1947)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우드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소녀 가장’이었던 터라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성공에 대해 강박증을 가져왔고 10대 시절부터 끊임없이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도록 만들었으며, 알코올 중독과 수면제 과용과 자살 시도로 몰아넣었다. 대중은 인형 같은 외모에 열정으로 가득 찬 그녀의 연기에 환호했지만 나탈리 우드는 그 누구보다 공허한 내면의 스타였다.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든 건 ‘검은 물’의 저주였다. 11세에 출연한 <그린 프라미스(The Green Promise)>(1949)는 그 시작이었다. 어두운 밤 폭풍우 속에서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녀가 건너가면 무너지기로 한 다리가 스태프의 실수로 일찍 무너졌고 그녀는 물에 빠졌다. 3년 뒤 <스타(The Star)>(1952)의 경험도 끔찍했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수정해 그녀가 보트에서 물로 뛰어들어 구조되는 장면을 즉흥적으로 연출하려 했다. 이미 물의 공포를 겪은 우드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고, 이때 분장실에서 뛰어나온 여주인공 베티 데이비스의 중재로 대역이 그 장면을 찍었다.
그녀는 마치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는 듯, 10대 시절부터 연애에 매달렸다. <이유 없는 반항>(1955)에서 공연했던 살 미네오와 데니스 호퍼를 비롯, 우드는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내트라 등 당대 최고의 스타와 어울렸다. 그리고 1957년, 19세의 우드는 27세의 배우인 로버트 와그너와 첫 번째 결혼을 한다. 우리에겐 <오스틴 파워> 시리즈에서 애꾸눈으로 등장하는 ‘넘버 투’로 인상적인 와그너는 우드가 열두 살 때부터 사랑을 느꼈던 존재였다.
하지만 ‘물의 저주’는 행복해야 할 신혼여행에도 검은 손을 뻗쳤다. 와그너는 작은 배 한 척을 전세 내 여행을 즐길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몰려온 폭풍 때문에 계획은 무산됐고 호텔 방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더욱 불행했던 건 와그너와의 결혼 생활이었다. 그들은 1962년에 이혼했다. 와그너의 ‘성적 습관’이 문제였다고 밝혀졌다.
이후 우드는 워런 비티, 마이클 케인, 스티브 매퀸 같은 배우들과 어울렸고 영국의 영화제작자인 리처드 그렉슨과 1969년에 재혼해 딸을 낳았지만 3년 만에 이혼했다. 와그너도 마리온 마셜과 재혼했지만 1971년에 이혼했다. 우드와 와그너는 이혼한 지 10년 만인 1972년에 재결합했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나탈리 우드의 커리어는 서서히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반면 와그너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TV 시리즈 <부부 탐정>(1979~1984)은 그 절정이었다. 이때 우드는 결국 유작이 된 <브레인스톰>(1983)에서 5세 연하의 배우 크리스토퍼 워큰을 만나 친구가 된다. <디어 헌터>(1978)의 러시안 룰렛 장면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던 워큰은 당시 막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유망주였다.
1981년 11월 와그너는 17미터짜리 캐빈 크루저(유람용 대형 모터보트)인 ‘더 스플렌더(The Splendor)’로 추수감사절 주말여행을 계획했고, 여기에 우드는 워큰을 초대했다. 행선지는 캘리포니아 연안의 산타 카탈리나 섬. 데니스 데이번이라는 크루가 동행했다. 와그너와 우드 사이엔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고, 우드는 와그너가 낮잠을 잘 때 워큰과 함께 항구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이후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발견한 와그너는 크게 분노했지만, 세 명은 밤에 다시 배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파티를 시작했지만, 와그너와 워큰은 크게 다투었다.
그날 밤 우드는 배에 딸린 작은 보트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없어졌다는 걸 와그너가 발견한 시간은 11월 29일 일요일 새벽 1시 30분. 그는 구조 요청을 했고 우드는 아침 7시 44분에 해변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이트가운 위에 붉은 다운재킷을 입은 상태였다.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배에 딸린 소형 보트가 있었다. 경찰은 우드가 소형 보트를 타고 해변으로 오려다 실족사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검시관 토머스 노구치가 “이 사건은 재수사의 여지가 많다”고 1983년에 낸 자신의 책에 쓴 것을 필두로 끊임없이 의혹은 제기되었다. 와그너의 배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그곳엔 마릴린 웨인이라는 여성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한밤중에 도움을 요청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침착해. 그쪽으로 구하러 갈게”라는 남자의 목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이후 조용해져서 구조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건 3일 뒤 ‘그날’에 대해 침묵할 것을 경고하는 의문의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한편 당시 크루였던 데니스 데이번과 우드의 동생이자 배우인 라나 우드는 실족사가 아니라 누군가가 물로 밀어 떨어트린 거라며 용의자로 남편인 와그너를 지목하기도 했다.
재수사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당시 경찰의 수사가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마무리되었고 와그너와 워큰의 진술도 매우 간단하게 끝났다는 건 사건의 미스터리를 더욱 증폭시키는 부분이다. 한편 최근 로버트 와그너는 <CSI-뉴욕>에 살인 용의자로 출연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