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빼줄 듯 꾀어 ‘벼룩 간’ 빼먹기
▲ 일본에서는 최근 기존의 사채업자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태도로 고리대를 갈취하는 ‘소프트 사채’가 성행하고 있다. 사진은 도쿄도 시부야 거리. |
경제지 <다이아몬드>의 보도에 따르면,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대부업체를 이용한 일본인은 올해 58만 명이다. 불법 사채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개정법 시행 전보다 1.4배나 늘어난 수치다.
올 4월 일본 금융청은 전체 대부업체 중 불법 사채 이용률이 약 2%로 크게 줄었다는 발표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올 7월 민간기관인 도쿄정보대학 연구팀이 내놓은 조사결과는 정반대다. 일본의 불법 사채 시장은 과거 불법 사채업 규모가 피크에 달했던 2002년도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소프트 사채업’이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소프트 사채업체들은 단기간 비교적 소액을 빌려주면서 친절하게 접근한다. 10만 엔(약 150만 원)에서 100만 엔(약 1500만 원) 정도를 일주일에서 열흘간 빌려준다. 이자는 평균 30~40%인데, 아무리 비싸도 50% 수준을 넘지는 않는다. 물론 상환시한이 매우 짧다는 점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이자다.
주 타깃은 주부나 영세자영업자, 생활보호자, 다중채무자 등 합법적인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기가 힘든 서민층이다. 업체는 대개 5~10명이 조를 짜서 다닌다. 따로 사무실을 마련하지 않고 아파트에 모여 살거나 차로 이동하며, 주로 휴대전화로 영업을 한다. 휴대전화나 거래 계좌는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타인 명의를 도용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돈을 꾸러 온 이들을 일관되게 정중한 자세로 대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업자들을 무서운 사채업자가 아니라 마치 마음씨 좋은 독지가나 구세주인 것처럼 여긴다. 사채업자는 줄곧 따로 자기 직업을 갖고 있는 척한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이 사채업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피해를 입은 한 67세 퇴직자는 “소프트 사채업자가 점점 친구가 되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퇴직금으로 주식을 하다 전부 날린 뒤 생활비가 떨어져 결국 서너 차례 여러 사채업자들한테 돈을 꿨다. 돈을 갚으려 경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긴 했는데 급여가 적어 꾼 돈을 갚지를 못해 고심했다. 그러다 광고 전단지를 보고 한 사채업자를 만나 4만 엔(약 60만 원)을 빌렸다. 사채업자는 따뜻한 어조로 “다른 데서 빌리지 못해 고생하시다가 여기 오신 거군요. 저희가 빌려드리지요”라고 흔쾌히 말한 뒤 당일 바로 요청한 돈을 입금했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그 후 무려 4년간 그는 월급날마다 꼬박꼬박 빌린 금액에 달하는 이자를 송금해야 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피해 남성은 업자가 마냥 다정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다른 사채업자와 달리 이자를 내놓으라며 윽박지른 적이 한 번도 없거니와 오히려 “혼자 살면서 어디 아픈 데 없냐”고 걱정을 해주면서 전화를 주곤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가 소프트 사채업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소프트 사채업자들은 큰소리를 치거나 폭력을 쓰는 위압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매너를 지키고 정기적인 통화로 건강이나 가족 문제 등 사적인 대화도 하면서 채무자와 인간적인 관계를 쌓는다.
일본의 사채시장을 장기간 취재해 온 저널리스트 구보타 마사키 씨는 “소프트 사채업자들은 피해자와 일종의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박 중독에 빠진 이가 돈을 빌리려 하면, 사채업자는 “무슨 도박을 또 하냐”고 핀잔을 주면서 돈을 내준다. 한 주 정도 채무 변제가 늦어지면 봐주기도 하면서 심지어 “내 사정도 좀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직장에 찾아가거나 집으로 방문하는 일도 없어 공무원이나 회사원 등 폭넓은 고객층이 이미 확보되어 있다.
소프트 사채업자들이 이렇게 유연한 자세를 취하는 이유는 굳이 위협을 하지 않아도 원금이나 이자 회수율이 높고, 피해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다시 이용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또 이런 식으로 대인관계를 맺으면,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를 할 확률도 적어진다.
빌리는 쪽에서는 여기저기서 빚을 지고 있는 마당에 다른 데 가봐야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체념해 높은 이자에 허덕이면서도 돈을 갚는다.
전문가들은 소프트 사채업이 개정 대부업법의 허점을 파고든 신종 범죄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현행법은 대부업체의 금리를 낮추고, 가계 파탄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컨대 이용자가 빌릴 수 있는 금액은 연 수입의 3분의 1을 넘기지 못한다. 전업주부나 무직 남성의 경우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또 절차도 까다로운 편이다. 개인사업자의 경우 세무결산서를 내야 하고, 돈을 빌리는 이들은 모두 대부업체 측의 신용정보 열람에 동의해야 한다.
이런 점 때문에 대부업체로부터 돈을 빌릴 수 없게 된 이들이 불법 사채 시장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이를 테면 주부들은 남편의 월급날까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돈을 빌린다. 거래처로부터 대금 입금과 급여 지급일 사이에 10여 일 정도가 비어 자금 조달이 힘든 영세사업체 경영자들은 직원 월급을 주기 위해 돈을 빌린다. 피해자들은 “합법 대부업체는 이용하고 싶어도 대출 금액이 소액이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법 사채업자들은 지금이 ‘장사하기 유리한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2010년 법 개정을 전후로 노인 대상 보이스 피싱을 하던 사기꾼들마저 불법 사채업자로 변신했을 정도라 한다. 소프트 사채업자들은 “어차피 사채가 아예 없어질 것도 아닌데, 어찌 보면 우리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돕는 카운슬러나 마찬가지”라며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