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독약 앰플을 깨물었다고?
▲ KAL기 폭파 용의자인 신이치는 바레인 공항에서 담배로 위장한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했다. 사진은 연출.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신이치가 일본말로 말했다.
“당신들이 탔던 KAL기가 추락했습니다.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비행기에서 내렸으니 당신들은 행운아입니다.”
“그렇습니까? 놀라운 일이군요.”
신이치는 이어 ‘아이 엠 소리’라고 말했다. 마유미라는 딸은 저쪽 침대에 누워 있어서 말을 나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방안을 살폈다. 방안에서 수상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신이치는 김정기 대리대사를 가로막으면서 문을 닫았다. 외국이라 김정기 대리대사는 더 이상 조사를 할 수 없어 큰 소득 없이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사관으로 돌아오자 한국의 안전기획부로 전화를 걸어 자세한 사항을 보고했다.
“그들이 일본인 같습니까?”
“현재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인 여권을 가지고 있지만 수상합니다.”
“신이치라는 자는 어떤 인물입니까?”
“몸이 깡마르고 눈매가 날카로운 자였습니다.”
“안기부에서 수사관들을 파견할 것입니다.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하세요. 그들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전기획부에서 당부했다. 김정기 대리대사의 보고를 받은 우리는 즉시 회의에 들어갔다. 그동안 태국 당국은 추락한 KAL기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대한항공의 조중훈 회장이 15명의 기술진을 이끌고 직접 태국으로 날아갔다. 회의에서 신이치와 마유미를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우리는 일본에 파견되어 있는 요원들의 정보망을 활용해 그들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대사관에 연락하여 이들의 여권을 자세하게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고 바레인 경찰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긴장된 시간이 흘러갔다. 회의와 자료 조사로 분주한 시간이었다. 11월 30일에 이어 12월 1일도 바쁘게 지나갔다.
12월 2일 신이치와 마유미가 공항에 나타났다. 그들은 일본인 여권을 가지고 출국검열대를 통과하려고 했다. 출국검열대에는 일본인 대사관 직원 둘이 나와 있었다. 바레인 경찰은 신이치와 마유미가 KAL기 추락사건의 용의자로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권을 정밀하게 검사했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육안으로 여권을 검사하고 통과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으로부터 수상하다는 연락을 받은 바레인 경찰은 철저하게 검사를 하여 그들의 여권이 위조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들은 즉시 출국 정지를 당해 공항에 억류되었다.
일본 대사관 직원이 그들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몸수색을 받아야 한다.”
바레인 공항 경찰은 신이치와 마유미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신이치는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담배로 위장한 독약 앰플이었다. 신이치는 앰플을 깨물어 자살했다. 순식간에 그의 사지가 경련하면서 숨이 끊어졌다. 그때 다른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마유미도 담배를 물었으나 바레인 경찰이 신이치가 자살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빼앗아 김현희는 미처 앰플을 씹어서 삼키지 못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들은 즉시 바레인 육군병원으로 후송되고 병원은 경찰이 삼엄하게 감시했다.
“뭐라고? 신이치가 독약 앰플을 깨물고 자살해?”
바레인 대사관으로부터 안기부로 보고가 들어왔다. 수사국장과 한영수 과장은 경악했다.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죽었어? 살았어?”
“남자는 죽고 여자는 살아 있습니다. 그들은 독약 앰플을 깨물었습니다.”
바레인 대사관의 보고는 안기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공작원이 발각되었을 때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하는 것은 북한 공작원의 수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공작원이거나 북한에서 직접 해외에 파견한 대남공작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신이치와 마유미는 바레인공항에서 위조여권이 적발되어 조사를 받던 중 담배케이스에서 청산가리가 든 캡슐을 꺼내 삼킨 뒤 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남자는 현장에서 죽고 여자는 마나마 시내에 있는 바레인 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바레인 일본대리대사 나쓰메 다카오가 발표했다. 국내외 언론이 그와 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마유미의 위를 세척했고 그녀의 치아에서 청산가리 찌꺼기가 검출되었다.”
바레인 육군병원의 의사들도 말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틀림없구나.’
나는 그러한 정보를 입수하자 전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안기부의 경험 많은 요원들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원인규명에 한 발짝 다가선 느낌을 가졌다. 과연 자신들이 한 일을 은폐하기 위해 그것도 담배 속에 은밀히 숨겨둔 청산가리가 든 앰플을 과감히 씹어서 자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경험으로 볼 때 적군파나 북한의 공작원들밖에 없었다.
우리 과의 책임자였던 한영수 과장은 그의 경험―북한에서 파견했던 여러 건의 간첩 수사와 1983년 발생한 다대포 침투 간첩사건―특히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가 깨물어 자살을 기도했던 앰플과 동일한 앰플을 가졌던 간첩 신광수 사건(납치된 일본인 하라 타다아키의 위조 여권을 사용해 일본에서 서울로 잠입하다 체포된 북한 공작원 사건)에 미루어 이것은 분명 북한 공작원의 소행이라고 단언했다.
“전 세계에서 청산가리 독약 앰플을 사용하는 나라는 북한 공작원밖에 없다. 하치야 마유미가 살아나면 반드시 한국으로 신병을 압송하여 조사해야 한다.”
한영수 과장은 마유미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12월 3일 북한 간첩 신광수가 검거 당시 몸에 지녔던 앰플을 가지고 바레인으로 날아갔다. 바레인 수사기관에 이것이 마유미와 죽은 신이치가 담배필터에 숨겼다가 깨물었던 독약 앰플과 같은 것이고 결국 이 사건은 북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유미를 한국 측에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청와대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해 오라고 지시했다. 박수길 외무부 1차관보가 안기부 요원들과 함께 12월 7일에 바레인으로 특파되었다. 청와대는 대통령선거가 12월 17일로 박두했기 때문에 마유미를 12월 13일까지 인도해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대형 참사의 충격에 휩싸였던 당시 국내 여론도 하루빨리 김현희를 국내로 끌고 오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박수길 차관보나 안기부 요원들은 선거를 떠나 어깨가 무거웠다. 바레인이 순순히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해줄 가능성이 희박했다. 바레인이 한국과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한 국가가 아닐뿐더러 마유미가 일본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에 신병이 인도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리아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아랍 국가들은 관영언론을 통해 “마유미는 가짜다”라는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바레인을 난처하게 하고 있었다.
박수길 차관보는 일단 바레인 공항에 도착한 직후 영국인인 아이언 핸더슨 바레인 CID(형사국) 국장의 도움으로 현지 경찰에 구금된 마유미를 면회할 수 있었다.
“당신 한국 사람이지요?”
“당신 일본 사람 아니지요?”
박수길 차관보가 잇달아 질문을 했으나 마유미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 1992년 4월 김현희가 최창아 씨에게 보낸 카드. 둘의 돈독한 관계가 엿보인다. |
박수길 차관보는 바레인 정부를 설득했다.
“북한 소행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없다.”
바레인 정부는 북한이 저질렀다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으면 신병을 인도해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증거를 제시하면 협조해 주겠습니까?”
“좋습니다.”
바레인 외무장관이 말했다. 이에 박수길 차관보와 한영수 과장은 마유미의 독약 앰플이 과거 서울에서 체포된 간첩이 썼던 것과 같은 종류라는 사실을 제시했다. 두 케이스의 독약은 사이나이다 종(種)으로 북한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었다. 박수길 차관보는 외무장관을 다시 만나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무하마드 칼리파 내무장관에게도 자료를 보여 주면서 신병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바레인 외무장관과 내무장관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눈치였으나 송환을 서두르지 않았다. 바레인 정부는 박수길 차관보의 집요한 설득으로 결국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각의에서 결정해 국왕에게 보고한 뒤에 인도하겠다. 절차를 밟아야 하는 만큼 14일쯤에 신병을 인도해주겠다.”
칼리파 내무장관이 약속했다.
양국은 철통보안 속에서 신병인도 실무협상을 벌였다. 그 협상에는 물론 한영수 과장을 비롯해 안기부 요원들도 참여했다. 수차례 교섭 끝에 양측은 대한항공 특별기가 14일(현지시각) 저녁 7시에 도착해 1시간 동안 급유한 뒤 김현희를 싣고 한국으로 떠난다는 계획에 합의했다. 박수길 차관보는 즉각 본부에 보고했고 정부는 곧바로 대한항공의 협조를 얻어 특별기를 파견하기로 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