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과 ‘침묵’의 대화가 오갔다
▲ 1987년 리젠시 호텔 앞에서 김현희. 사진출처=MBC PD수첩 |
▲ 1987년 리젠시 호텔 앞에서 최창아 씨. 사진제공=최창아 씨 |
호텔까지 오는 동안 땀을 흘렸기 때문에 샤워를 했다. 그러나 물이 뻑뻑하여 머리카락이 엉켜 붙어 빗질을 해도 잘 풀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뭐 이런 물이 다 있지?’
나는 중동이 물이 귀한 사막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외국에 처음 나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그날 밤을 호텔에서 묵었다. 날이 밝았으나 마유미를 언제 인도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마유미의 인도 협상은 외무부에서 했기 때문에 무작정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으니 나가서 시내구경이라도 해. 오늘 처음 외국에 나온 사람도 있을 거 아니야?”
한영수 과장이 우리에게 100달러씩을 나누어주면서 말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거리로 나왔다. 나와 채명희는 모직 투피스 상의를 벗어 팔에 걸치고 블라우스 차림으로 사람들을 따라 시내관광에 나섰다. 그러나 특별한 물건을 살 수는 없었다. 간호사들은 페르시아 카펫을 샀다. 그러나 채명희와 나는 마유미를 호송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그런 물건들을 살 수 없었다.
‘명색이 페르시아 카펫인데….’
나는 임무 때문에 그런 물건을 사지 못해 아쉬웠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가족을 생각하게 되는데 나도 부모님을 위한 선물을 사서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한영수 과장은 바레인에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수도인 마나마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시내를 관광했다. 겨울복장이었던 우리는 모두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치고 있었으나 땀을 쉴 새 없이 흘렸다.
“여기가 리젠시호텔이야. 마유미와 신이치가 머물렀던 곳이지.”
한영수 과장의 말에 놀라서 호텔을 쳐다보았다. 리젠시호텔은 크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마유미와 신이치가 묵었던 리젠시호텔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김현희도 이곳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현희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다.
두 시간 남짓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이게 뭐지?”
채명희가 침대 옆에 둘둘 말아서 세워 놓은 돗자리를 보고 나에게 물었다.
“카펫 아니야? 침대 담요거나….”
“무슨 카펫이 이렇게 작아?”
채명희가 의아해 했으나 나도 용도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었으나 그것은 무슬림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씩 기도를 할 때 까는 돗자리였다. 나는 그때서야 무슬림 문화의 독특한 면을 이해했다.
바레인은 인구가 당시 약 55만 명이었고 입헌군주국이었다. 수도는 마나마였는데 한때 영국 보호령으로 있다가 독립했다. 마나마는 석유로 인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부가 넘치고 있었다. 마나마는 해안가에 있어서 중동지방이라고 하지만 비교적 아름다웠다. 호텔에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뜻밖에 마유미를 즉시 인도해 가라는 바레인 당국의 요청이 대사관을 통해 전달되었다.
“마유미가 인도된다. 즉시 짐을 정리해.”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 우리는 명령을 받자 황급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부랴부랴 공항으로 달려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어느 사이에 밤 9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사막의 밤바람은 건조하면서도 약간 쌀쌀했다.
공항 경계를 따라 빙 둘러 조명이 켜져 있었으나 공항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항의 경비는 여전히 삼엄했다. 오히려 도착했을 때보다 더 많은 특수부대 복장을 한 군인들이 공항 주변에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를 태운 차량은 공항 내에서도 계속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던 차가 멈추고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는 태극 마크가 선명한 비행기가 트랩을 내린 채 서 있었다. 우리가 타고 왔던 전세기였다. 어두운 활주로 100미터쯤 저쪽에 미등만을 켠 채 서 있는 여러 대의 차량이 보였다.
“저기에 마유미가 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유미를 비행기 트랩 앞에서 넘겨받기로 했습니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아마 대사관 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가방을 비행기에 싣고 다시 내려와 비행기 트랩 앞에서 기다렸다.
우리와 함께 왔던 특수부대 요원들도 완전무장을 하고 대기했다.
“마유미를 인도 받으면 즉시 양쪽에서 팔짱을 끼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입에 마우스피스를 채워. 다들 긴장해.”
김영호 과장이 지시했다. 나는 긴장 때문에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리 쪽으로 차량들이 서서히 이동해왔다. 차량들을 바레인 군인들이 삼엄하게 감시하면서 따라왔다. 나는 마른침을 꿀컥 삼켰다. 이내 서서히 달려오던 차량들이 멎었다. 여러 대의 차량 중에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여자가 내렸다. 하늘색의 트레이닝 복장에 어깨에 걸친 국방색 스웨터는 흘러내리지 않게 양 소매로 대강 묶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눈을 감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무릎도 구부리고 거의 들리다시피 하면서 와서 그런지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왜소해 보였다.
김영호 과장이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는 남자수사관과 함께 재빨리 그녀를 낚아챘다. 그녀는 거의 저항하지 않고 있었다. 나와 남자수사관은 그녀의 양 팔을 잡고 동시에 다른 수사관은 준비해 간 마우스피스를 그녀의 입에 끼우고 여러 겹의 반창고를 붙였다.
“빨리 태워.”
우리는 어떤 긴박한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마유미를 거의 번쩍 들듯이 팔짱을 끼고 트랩을 올라가 비행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유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계단에 걸려 넘어지거나 비행기 좌석 손잡이에라도 부딪칠까봐 최대한으로 조심했다.
마유미를 비행기에 태우자 특수부대 요원들도 재빨리 비행기에 올라탔다. 우리는 기내에 오르자마자 그녀를 가운데 좌석에 앉히고 수갑을 채웠다. 마유미 옆에는 여자 수사관들인 나와 채명희가 양쪽에 앉았다. 마유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배려였다.
마유미 주위에는 몇몇 수사관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좌석에 떨어져 앉게 했다. 마유미는 인도받을 때부터 줄곧 눈을 감고 있었고 우리들 이야기에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유미를 호송하면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그녀가 혹시라도 자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여자 수사관인 나와 채명희가 양쪽에 앉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행동을 주의해서 살폈으나 특별히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마유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눈을 감고 수갑을 찬 두 손을 마주잡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우스피스를 부착한 입에서는 자꾸 침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계속 닦아주어야 했다.
이내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나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더욱 긴장했다. 마유미를 무사히 인도받았으나 공중에서 공격당할 염려도 있었다. 나는 무사히 한국에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비행기가 이륙을 마치자 나는 비로소 마유미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표정은 초췌해 보였고 젊었다.
나는 마유미가 긴 비행 시간 동안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신발을 벗기고 기내 양말을 신겨 주었다. 가끔 발걸이에 발을 얹어 주기도 했다.
마유미를 비행기에 태우자마자 우리에게 내려진 지시는 모두 한국말만 하라는 것이었다.
“목이 마르면 물 갖다 줄까요?”
나도 그녀가 듣는지 못 듣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야기를 했다.
“양말 신기게 신발 벗어요.”
마유미는 내 말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함께 갔던 다른 부서의 직원이 그녀 곁으로 다가가 한국말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유미를 자세히 살폈다. 트레이닝복을 입어서인지 몸매가 잘 드러났는데 어깨와 하체, 특히 허벅지는 꽤 발달한 듯 보였지만 몸집에 비해 자그마한 얼굴에 눈썹은 거의 다 뽑은 듯이 손질되어 있었고 양 뺨은 기미자국이 두드러져 보였다. 피부색도 누렇게 떠 있었으며 파마기가 있는 머리는 부스스했다. 좁은 이마가 답답해 보였는데 이마만 더 넓었으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의 얼굴이었을 것 같았다.
‘과연 저 여자가 북한공작원일까 아니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제3국의 여인일까?’ 나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위에서부터 훑어보던 내 눈길은 그녀의 손에 머물렀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손이었지만 손마디가 억세고 여기 저기 상처가 있었다. 나에게는 고된 단련으로 굳어진 손으로 보였다. 후에 그녀에게 물어보자 훈련을 받아서라기보다 학생시절 농촌 모내기와 군사훈련에 동원되어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