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자립 도모 넘어 기업 운영 메커니즘 배워…업사이클링 기업 ‘커피큐브’가 적극 도와
서울시 상암동 마포청소년문화의집에서 만난 박선숙 관장은 실패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꺼냈다. 대안교육을 받거나 학교를 아예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모인 이곳은 하루하루가 '사건'으로 가득하다. 청소년들의 황당한 실수에 실소가 터지기도, 어떤 때는 뜻밖의 성과로 환호를 내지른다. 박 관장이 오히려 아이처럼 밝고, 청소년들이 되레 어른처럼 진중한 모습도 이색적인 광경이다.
#'커피로 연필을 만들어 판다'
박 관장의 큰 그림은 '커피로 연필을 만들어 판다'는 각오였다. 정확히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운영하는 센터 내 카페에서 발생한 커피찌꺼기(커피박)를 고형화해 연필을 만들고, 이를 매출로 연결해 예산을 늘려 보겠다는 포부였다. 언뜻 황당하게 들리지만 뒷배가 있었다. 업사이클링 기업 '커피큐브'가 기술을 갖춰 적극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학교를 안 다니는 아이들이 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직접 카페를 운영 중이에요. 그런데 저희 바람은 얘들이 뛰어난 바리스타가 되는 데에 그치진 않거든요. 많은 경험으로 사회에 홀로 서는 게 최우선인데, 커피박으로 연필 만드는 작업이 꽤 손이 많이 가더라고요. 아직은 애들 실력이 무르익지 않아서 중단했어요."
사실은 빠른 포기였다. 학교 밖 청소년들이 카페를 이끈 지는 수년째지만, 매장이 '커피박 제로' 방침을 세운 지는 불과 열흘도 안 됐다. 6월 27일 '커피박 환전소' 문을 열었다는 성과에 우선 의미를 두고 있다. 고객들이 커피찌꺼기를 가져오면 찰흙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점토형 커피박으로 바꿔주는 이색적인 서비스다.
박 관장이 빠른 포기를 담담하게 인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청소년지도사 경력 약 20년째인 그마저도 학교 밖 청소년들과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속내를 밝히기 꺼려해 센터의 직원들도 급하게 다가가지 않는다고 한다.
#찬사를 받아야 할 아이들
"카페 운영만 해도 만만치는 않아요. 몇몇 아이들은 사람을 상대하는 자체에도 부담을 느끼는 편이거든요. 간혹 낯가림이 심해 출근마저 고민을 했는지 지각을 많이 한 애들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크게 질책하진 않아요. 단점보다 장점에 주목해서 계속 응원하고, 변화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면 결국 빛을 내거든요."
이렇듯 센터가 존재하는 이유는 학교 밖 청소년들의 '역전 드라마'를 위해서다. 처음에는 소심하거나 매사에 서툴렀던 아이들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놀랍게 변했다. 능숙하게 주문을 받아 음료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학교 밖 청소년들한테 일자리를 양보하겠다"며 일을 관둔 뒤 대학에 진학해 봉사활동 등으로 이웃들에 온정을 나누는 학생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라현(가명)이는 음악에서 두각을 나타내 사람들에 실력을 자랑할 수준까지 올라왔다. "받아온 사랑을 나누고 싶다"며 때로는 센터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주기도 한다. 프랜차이즈 등 대형 카페나 다른 일을 하길 꿈꾸는 동생들에게 이력서와 면접 '꿀팁'까지 전수해줄 정도로 성장했다.
재호(가명)도 센터가 주목하는 예술계 유망주다. 재호 덕분에 새로운 장르의 음악과 영화 및 미술 등을 접한 센터 직원들이 많다. 각 분야별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명곡이나 명화 등을 찾아내는 재주가 너무 탁월해 놀랄 정도다. 언젠가는 재호가 직접 음악이나 영화를 만드는 날도 오지 않을까.
이는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저마다의 잠재된 능력을 무기로 각 분야에서 꽃을 피운 아이들은 훨씬 더 많다. 무엇보다 센터를 찾아온 자체만으로도 분명히 찬사를 받아야 할 존재라고 박 관장은 강조한다. 단지 학교라는 공간과 맞지 않아 거리두기를 했을 뿐, 각자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삶을 걷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한번 해보자" 팔걷은 어른들
박 관장은 앞으로도 학교 밖 청소년들의 성공스토리를 지켜봐 달라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커피찌꺼기로 연필 만들어 팔기'에 아직 미련을 못 버렸다. 이 청소년들의 카페에선 지금도 커피를 주문한 고객에게 해당 연필들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있다. 다른 데서 완제품으로 들여오지만, 청소년들이 직접 만들면 훨씬 의미가 클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밖에 있는 만큼 오히려 더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유통업인 카페 운영도 새로운 도전이지만, 연필 제조업까지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특히 카페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원재료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세련된 친환경 신사업에 도전하는 거예요. 멋지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꼭 해낼 거예요."
박 관장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커피큐브'가 적극 도와주고 있어서다. 2013년 설립돼 커피박 재활용 관련 국내외 특허도 보유한 회사다. 커피박 고형화 기술을 개발해 부엉이 인형 '씨울' 제작을 시작으로, 현재는 컵과 화분 심지어 벽돌도 생산한다. 최근 연필 제조도 나섰는데, 이는 60세 이상 노인들을 고용해 생산하고 있다.
센터 안 커피박 환전소도 커피큐브의 서울 면목동 직영매장 '커피박 환전소 카페' 운영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집이나 사무실 등에서 나온 커피찌꺼기를 교환해주는 커피점토, 음료 주문 시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박 연필 등이 전부 커피큐브의 제품이자 독특한 사업 방식이다.
박 관장은 커피찌거기 사업을 통해 학교 밖 청소년들이 기업 운영 전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단계까지도 가능하다고 본다. 커피박 자체는 청소년들이 카페와 환전소에서 각각 만들고 있으므로, 연필까지 만들면 원재료 생산부터 유통 및 제조까지 전 과정을 이끄는 '마지막 퍼즐'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필 등의 제작을 늘릴수록 일자리도 증가하기에 고용도 스스로 창출할 수 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커피큐브한테도 중요한 사업 파트너다. 임병걸 커피큐브 대표는 "시민들에 커피박 환전소를 알리는 데에 학교 밖 청소년들이 참여한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한 일"이라며 "연필은 전국 자활센터 등의 60대 이상 어르신들이 주로 만들어주시는데, 청소년들한테도 문은 늘 활짝 열려 있다. 연필은 청소년들이 가장 큰 소비층이라 아이들이 참여하면 디자인 등 수요자들이 만족할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