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공룡들에게 ‘빙하기’ 몰려오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안철수의 생각>에서 밝힌 ‘재벌 생각’의 총론 격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운동경기에 빗대 같은 출발선(공평한 기회), 패자부활(사회안전망)과 함께 공정한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은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으로 이어진다. 그는 책에서 이를 위한 여러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안철수의 재벌 생각’이 현실화할 경우 재계에 미치는 파장을 짚어봤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정치권의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움직임과 관련, 한 대기업 임원의 하소연이다. 재벌, 재벌가에겐 그만큼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셈. 유력 대선주자이지만 공식 출마선언도 하지 않은 ‘안철수의 재벌 생각’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움직임에 탄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생각은 다른 대선주자, 특히 야권에 투영돼 대선 레이스에서 주요 이슈화할 공산이 적지 않다.
재벌개혁과 관련해 가장 민감한 사안은 바로 순환출자 폐지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이다. 순환출자는 여러 기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양으로 서로 투자해서 대주주가 적은 지분을 갖고도 계열사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출자총액제한제는 기업이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한도를 제한해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제도로 재벌의 지배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 안철수 원장은 “가공자본을 만드는 순환출자를 없애는 방향이 맞고, 유예기간을 주되 단호하게 철폐해야 한다. 출자총액제한제는 정권에 따라 없앴다 부활했다 하는데,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 말고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을 좀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순환출자가 철폐될 경우 직격탄을 맞을 곳은 현대차그룹이다. 경제개혁연구소의 최근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최소 6조 1665억 원의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현대중공업(1조 5763억 원), 삼성(1조 2185억 원), 영풍(1999억 원), 현대백화점(1537억 원), 롯데(1110억 원) 등의 순이었다.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정몽구 회장 등 현대차 지배주주가 경영권을 유지(상장사 지분율 30%, 비상장 50%)하기 위해 반드시 취득해야 하는 지분가치는 5조 9874억 원에 달했다. 현대중공업은 1조 5763억 원이었고 삼성은 7656억 원에 그쳤다. 재계에서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주식 추가 매입 등 간접비용까지 따지면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든다고 주장하고 있어 해당 그룹들에게 큰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출자총액제한제가 부활할 경우 재벌들은 상한선 이상 초과 출자분을 매각 등의 방법으로 해소해야 한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 2월에 내놓은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순자산의 30%(민주당안)를 상한선으로 할 경우 20대 재벌 중 출자 해소가 필요한 곳은 총 8곳이었다. 한화그룹이 2조 9552억 원어치의 지분을 해소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SK(2조 7008억 원)와 한진(2조 1659억 원)도 2조 원대였고 현대중공업(1조 5631억 원), 현대(6924억 원)가 그 뒤를 이었다.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와 ‘골목상권 침해’에 대해서도 안 원장은 “대주주나 그 자녀가 적은 종자돈으로 회사를 만든 다음 계열사들의 ‘일감 몰아주기’로 급성장시켜서 재산과 경영권을 편법 상속하는 일도 흔했다. 또 재벌 계열의 유통 대기업들이 기업형슈퍼마켓(SSM)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골목 상점,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입었느냐”며 강력한 규제 의지를 나타냈다.
현재 일감 몰아주기가 심한 것으로 당국이 파악하는 업종은 IT(SI) 건설 광고 물류. 그중 IT업종은 당장 지난 8일 SK C&C가 계열사에 현저히 유리한 조건으로 일감을 몰아준 혐의로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과 함께 업계 사상 최대인 346억여 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았다. 게다가 이 분야는 안 원장의 전문 영역. 주요 IT업체를 보유한 삼성그룹(삼성SDS), 현대차(현대오토에버), LG(LGCNS), 롯데(롯데정보통신) 등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골목상권 침해 문제는 롯데그룹, 신세계, 홈플러스 등을 위협한다.
법인세 인상 여부도 기업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 안 원장은 “우리나라의 법인세율 자체는 OECD 평균과 비슷한데 실효세율이 매우 낮다. 단계적으로 접근해서 실효세율을 높이는 노력을 우선 기울이고 그 다음에 구간 조정을 검토하는 게 어떨까 한다”며 “법인세 실효세율이 낮은 것은 각종 감면제도가 많기 때문인데 막대한 수익을 내고 있는 대기업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게 만든 제도들은 대폭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생각이 현실화하면 감면을 많이 받아 실효세율이 낮은 기업들에게 불똥이 튈 수 있다. 지난 5월 발표한 참여연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제조업 외감기업을 대상으로 한 실효세율(법인세비용 합계÷법인세비용참감전순이익×100) 추정치는 17.5%였지만 10대 재벌은 15.1%에 그쳤다. 그룹별로는 LG가 7.5%로 눈에 띄게 낮았는데 이는 대규모 적자 때문이었고 GS 11.6%, 삼성 11.7%, 현대차 17.4% 순으로 전체 실효세율보다 낮았다. 이 해 조세지원액이 가장 많은 기업은 삼성전자로 1조 8442억 원이었다. 2위 하이닉스(6012억 원)나 4위 현대차(4886억 원)에 세 배 이상 압도적인 액수다.
안 원장은 “기업주가 전횡을 일삼거나 주주일가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법률 제도적으로는 처벌 대상이 되는데 지금까지 행정·사법부가 입법 취지대로 집행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근 횡령·배임죄에 대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도록 법 개정이 추진 중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더 중요한 건 이어지는 대목. 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가벼운 형을 선고하고 쉽게 사면해주는 관행도 바뀌어야 정의가 선다”고 덧붙였다.
이런 생각은 재판을 받고 있거나 아직 사면을 받지 못한 재벌가에겐 그 무엇보다 민감할 수 있다. 현재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동생 최재원 부회장이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김승연 한화 회장, 담철곤 오리온 회장, 이호진 전 태광 회장 등의 공판 역시 끝나지 않았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