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정권에선 “너 죽고 나 살자”
▲ 잇달아 터진 대형 금융 사건들을 놓고 정부 부처와 금융당국 간 책임공방이 치열하다. 부실저축은행 예금자들에게 가지급금을 지급한다는 한 은행 점포 앞에 저축은행 예금자들이 몰려 있다. 유장훈 기자 |
‘정관계 인사의 금융감독원 영향력 행사, 철저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한다.’
금감원 공채 직원 600여 명이 지난 19일과 20일자 일부 신문에 저축은행 부실사태가 모피아 금융관료들의 규제완화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비판 광고를 게재했다. 이 광고에서 금감원 직원들은 저축은행 사태가 금감원 내부 비리처럼 치부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재경부(현 기획재정부) 출신 금융관료들이 문제를 키웠고, 이에 대한 책임도 그들이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금감원 직원들이 잇달아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데 반해 저축은행 규제 완화를 결정한 재경부 인사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인 셈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의원이 구속될 정도로 정치권이 저축은행 사태를 키웠는데 금감원만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도 드러냈다.
금감원 직원들의 비판 광고에는 그동안 금융 정책을 둘러싸고 진행해온 부처 개편의 역사가 깔려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금융과 관련한 정책은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이, 감독은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을 강화화기 위해 제정된 ‘금융감독기구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은행감독원 등 기존 감독기관이 통합돼 금융감독원으로 일원화됐다.
금융감독원은 기존 민간기관들의 통합으로 탄생한 탓에 정부 부처가 아닌 민간기구다. 금감원 출범에 맞춰 금융 감독의 중립성 확보를 위해 새로운 정부 부처로 금융감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금감위는 금감원 지도와 다른 부처의 입김이 금감원에 미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두 기구 간 관계가 밀접하다보니 금감원장과 금감위원장을 겸직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금융 정책 부처는 다시 한 번 개편됐다. 재경부와 기획예산처가 기획재정부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재경부에서 떨어져 나온 금융정책국이 금감위에 합쳐지며 금융위원회로 확대 재편된 것. 또 금융위원장과 금감원장의 겸직은 금지됐다. 금감원 직원들이 저축은행 사태를 놓고 옛 재경부 관료에게 화살을 돌리는 이유는 조직개편을 통해 금융정책을 책임지게 된 금융위로 향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금융위가 금감원을 지도하도록 한 구조 때문에 지금껏 두 기관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금감원장 등 임원 임명 권한을 금융위원장이 갖고 있다 보니 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다. 이런 갈등이 저축은행 사태 이후 더욱 심해졌다. 금융위는 저축은행 사태를 감독 실패 때문으로 보는데 반해 금감원은 모피아 비판 광고에서 알 수 있듯이 정책의 실패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조금이나마 피하려 한 것일까. 최근 금융위가 여의도 금감원 빌딩에서 나와 광화문 파이낸스센터로 이전키로 했다. 금융위는 이명박 정부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며 2008년 3월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지방조달청 건물에 살림을 차렸다. 당시 금융위와 금감원이 각각 서초동과 여의도에 있어 금융회사와 민원인의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2009년 1월 금융위가 금감원 건물로 이사를 하면서 한 건물을 써왔다. 그러나 다시 금감원 빌딩에서 나와 조만간 광화문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융위 이전에 금감원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금융위 폐지론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최근 저축은행 사태와 CD금리 담합 의혹 등 각종 금융 관련 사안이 잇달아 터진 것과 관련해 금융위가 금융감독과 금융정책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감독업무가 부실해진 탓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금융학회는 ‘금융감독체계 개편’과 관련한 정책 토론회에서 금융위의 금융정책 기능을 기재부에 환원하고, 금융위는 폐지하는 안을 내놓은 상태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뤄진 정부부처 개편을 다음 정권에서 손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러한 개편안은 금융위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셈이다.
여기에다 CD금리 담합의혹을 둘러싼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 금감원 간 갈등 역시 밥그릇 다툼 탓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저축은행 사태가 처음 터진 지난해 5월 이명박 대통령은 금감원의 감독 미비를 질책한 뒤 국무총리실 주도로 금융감독 혁신 TF(태스크포스)를 만들도록 했다. 그 결과 저축은행 예금자나 금융상품 투자자 등의 민원처리 등을 맡는 금융소비자보호처가 금감원 내에 신설됐다. 현재 금융위와 금감원은 금융소비자보호처를 금융소비자보호원으로 승격시키는 안을 추진 중이다.
이러한 갈등은 공정위의 이례적인 행보와 금융위, 금감원의 반발에서도 드러난다. 공정위는 담합과 관련, 자진신고 여부 등 조사 진행 상황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번 CD금리 담합 의혹과 관련해서는 “모 금융회사가 담합사실을 털어놨다”는 식의 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20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 질의에서 “(금융회사들이 CD금리) 담합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공정위 조사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정부 부처와 금융당국의 갈등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CD금리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몇 년째 이어졌음에도 금융당국이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CD금리 담합 의혹이 터져 나온 탓이다. 지난해 12월 금감원이 CD금리를 대체할 새로운 금리를 개발하기 위해 TF를 만들었으나 금융위와 소관을 둘러싼 갈등에 몇 차례 회의만 열린 뒤 중단됐다. 그러다 CD금리 담합 의혹이 제기되자 금융위와 금감원은 TF를 다시 가동하고 CD금리를 대체할 새로운 금리 개발에 들어갔다.
저축은행 사태도 금융당국의 감독미비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것은 피해나갈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 저축은행 사태와 관련해 금감원 전 직원 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저축은행 사태나 CD금리 담합 의혹 등에 대한 부처와 금융당국 간 책임 떠넘기기가 다음 정권에서 있을 조직 개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되고 있다”면서 “저축은행 사태에 따른 피해자나, CD금리 담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발생할 피해가 명백한데 이를 등한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민들이 더 이상 금융정책이나 감독 미비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안을 마련하는 것이 오히려 살아남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