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망해도 ‘회장님’은 책임 없다?
▲ 펀드 열풍을 타고 초고속성장을 해온 박현주 회장의 미래에셋이 펀드를 비롯한 투자업종의 불황으로 힘든 시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미래에셋그룹은 공기업을 제외한 재계순위 35위에 올라 있다. 자산은 8조 4000억 원으로 지난해 6조 6000억 원에서 1조 8000억 원 늘었으며 계열사는 지난해 29개에서 30개로 늘었다. 미래에셋그룹의 모태는 1997년 자본금 100억 원으로 출발한 미래에셋캐피탈. 불과 15년 만에 재계 30위권까지 치고 올라왔다. 더불어 동원증권의 샐러리맨이었던 박현주 회장은 지난해 국내 10대 부자에 이름을 올릴 만큼 어마어마한 자산가가 됐다.
박현주 회장과 미래에셋은 펀드 열풍을 타고 초고속으로 성장했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내재돼 있었다. 빠른 성장에 맞춰 한꺼번에 확장한 사업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미래에셋증권은 올해 들어서만 33개 지점을 없앴다. 올 상반기 13개 지점을 없앤 데 이어 최근 20개 지점을 통폐합했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효율의 극대화를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렇게 해석하기엔 없애고 통폐합한 지점 수가 너무 많다. 올해 112개였던 미래에셋증권 지점은 두 번의 통폐합으로 9월 들어 79개로 확 줄었다. 더욱이 2008년 150여 개에 달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빠르게 확장했지만 그만큼 빠르게 축소된 셈이다.
지점이 줄어들면 인원도 줄어들게 마련. 실제로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상반기 국내 증권사 임직원 수가 크게 줄어든 가운데 미래에셋 역시 2234명에서 2103명으로 임직원 수가 131명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증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거르지 않았던 공채를 올 상반기에는 생략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또 지난 3월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과 합병했다. 겉으로는 62조 원 자산을 거느려 글로벌 운용사로 도약할 것임을 밝혔지만 내부적으로는 인원 감축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는 속사정이 외부로 알려졌다.
일련의 정황만 봐도 미래에셋이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미래에셋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주식거래대금이 급격히 줄고 펀드 환매율은 점점 높아지는 반면 펀드 신규 가입률은 떨어지고 있다. 자산운용업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올 들어 국내 펀드에서 빠져나간 돈은 무려 7조 3000억 원이 넘는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오른쪽의 미국, 왼쪽의 유럽, 가운데의 중국, 어느 한 곳도 좋은 곳이 없다”며 “펀드 유출이 심해 자산운용사도 어렵지만 지금은 증권사가 훨씬 더 어렵다”고 말했다.
미래에셋의 위기가 여기에 기인한다는 의견도 있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미래에셋의 수익구조가 펀드에 너무 치중해 있는 탓”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잘못된 지적”이라며 “우리의 수익구조는 다변화돼 있다. 오히려 위탁거래가 많은 다른 증권사들이 더 위험하다”고 반박했다.
그런가 하면 자산운용업계에서도 미래에셋이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자산운용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그동안 미래에셋이 너무 잘나간 탓”이라며 “지금은 다른 운용사들과 눈높이를 맞춰가는 과정인 듯하다”고 평했다.
잇단 인력 이탈도 미래에셋의 위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미래에셋은 최근 글로벌 사업 분야에서 핵심인력들이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잦은 인력 교체와 이탈이 박현주 회장의 단점 중 하나로 지적돼온 마당에 또 다시 인력 이탈이 발생하는 것은 글로벌 사업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박현주 회장 개인적으로 업계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금융권에서 큰손 역할을 하는 산업은행과 국민연금에 ‘미운털’이 박혀 ‘박현주의 미래에셋과 거래하지 말라’는 얘기도 나돌았다는 것. 지난해 5월 휠라코리아와 함께 어큐시네트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쪽이 산업은행과 국민연금인데도 미래에셋이 마치 자기들이 주도한 것처럼 알렸던 것이 발단이 됐다고 한다.
안팎으로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박현주 회장은 미래에셋 어느 계열사에도 대표이사로 올라 있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4월 기준으로 미래에셋그룹의 계열사는 모두 30개. 이 가운데 미래에셋 측이 국내부문 대표 계열사로 자사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곳은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증권, 미래에셋생명,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벤처투자, 부동산114, 미래에셋펀드서비스, 미래에셋컨설팅 등 8개사다.
이 중 박현주 회장이 대표이사로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사내이사로 등재된 곳도 미래에셋자산운용뿐이다. 미래에셋그룹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법인등기부상 대표이사는 옛 동원증권 시절부터 박현주 회장의 ‘왼팔’로 통해온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 박 회장은 2004년 등기된 것을 끝으로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다 2009년 사내이사로 다시 등재, 지금까지 박 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 사내이사로 돼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또 눈에 띄는 점은 법인등기부상 대표이사가 여러 명이라는 점. 구 부회장뿐 아니라 정상기, 김경록 대표도 대표이사로 등재돼 있다.
대표이사가 여러 명인 경우는 미래에셋 계열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미래에셋증권은 조웅기 대표와 변재상 대표가 각자대표를 맡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조 대표는 리서치·법인·IB 분야를, 변 대표는 리테일 등 분야를 각자대표로 맡고 있다”고 답했다. 미래에셋증권에서 박 회장은 법인등기부상 이사직마저 2006년 5월 12일 사임했다.
미래에셋벤처투자, 미래에셋펀드서비스, 부동산114 등 미래에셋그룹 대표 계열사의 법인등기부에서 박현주 회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심지어 박현주 회장이 48.6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박 회장의 부인과 자녀 등 친족이 43.23%를 보유해 동일인 측 합계 91.86%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미래에셋컨설팅에도 박 회장은 임원으로 돼 있지 않다. 미래에셋컨설팅은 일각에서 ‘박 회장 가족회사이자 미래에셋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으로 통한다.
다만 박현주 회장의 이름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현주 회장이 관여하고 있는 재단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미래에셋육영재단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이다. 이 중 미래에셋육영재단에는 이사로 올라 있다. 박 회장이 서류상 대표권한을 갖고 있는 유일한 곳이 재단법인이다.
이처럼 그룹 회장이면서도 박 회장은 대표이사나 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미래에셋그룹 측은 “(계열사별) 책임·독립경영을 위한 것”이라며 “그러나 박 회장은 오너이자 대주주”라고 말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주식회사의 최종 책임자는 대표이사여서 오너가 지주회사나 핵심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게 상식”이라며 “직위만 있고 직책이 없다면 책임경영이 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재계 30위권에 올라 있는 기업 중 오너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의문을 제기하자 미래에셋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대표이사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삼성특검을 거치면서 삼성전자 대표이사직을 사임하는 등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이 회장과 박현주 회장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대표이사는 맡고 있지 않지만 박현주 회장은 미래에셋그룹에서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 회장은 그룹 모태인 미래에셋캐피탈의 최대주주일 뿐 아니라 미래에셋컨설팅,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최대주주다. 미래에셋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보면 박현주 회장을 비롯한 박 회장 일가가 미래에셋캐피탈 49.96%, 미래에셋컨설팅 91.86%, 미래에셋자산운용 62.56%를 보유하고 있다. 박 회장은 세 회사를 통해 나머지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박 회장 가족회사로 알려져 있는 미래에셋컨설팅은 그룹의 지주회사 격으로서 지배구조의 중심에 있다.
박 회장 일가가 미래에셋컨설팅의 지분을 늘릴 수 있었던 까닭은 2010년 KRIA와 합병했기 때문. 2008년 KRIA에서 인적분할해 미래에셋컨설팅이 분리해 나왔지만 2년 만인 2010년에는 오히려 KRIA가 미래에셋컨설팅으로 흡수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1997년 설립한 KRIA는 미래에셋컨설팅과 합병 전 박 회장이 43.68%의 지분을 보유했던 데다 박 회장 부인이 10.24%, 세 자녀가 각각 8.19%씩, 모두 78.49%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회사가 미래에셋컨설팅과 합병했으니 박 회장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졌고 미래에셋컨설팅은 일약 지주회사 격으로 부상했다.
이 같은 구조에서 박 회장은 비록 대표이사도 이사회 의장도 아니지만 대주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박 회장이 유일하게 사내이사로 등재돼 있는 미래에셋자산운용 관계자는 “(박 회장은) 국내 사업보다 글로벌 사업 추진에 매진한다”며 “이사회에 꼬박꼬박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전했다.
한편 미래에셋그룹 계열사 등기부 임원 현황을 들여다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각 계열사의 임원은 물론 대표이사도 수시로 바뀌었다. 게다가 창업공신들인 최현만 수석부회장과 구재상 부회장을 비롯해 정상기 사장, 변재상 대표, 김경록 대표, 강길환 대표, 김승건 대표 등 몇몇 사람이 전 계열사를 돌아가면서 대표이사를 맡아왔고 지금도 이들이 미래에셋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 더욱이 이들은 한 계열사의 대표이사면서 동시에 다른 계열사의 사내이사, 이사, 기타비상무이사, 감사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
박 회장은 직접 대표이사를 맡는 대신 촘촘하게 얽힌 이들을 통해 거함 미래에셋을 움직이는 셈이다. 폭풍우를 맞고 있는 미래에셋이 박 회장의 독특한 경영·지배구조를 통해 순항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