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고기’는 ‘민물’서 살 수 없다?
최근 증권가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면서 국내 증권사에서 일하던 외국계 증권사 출신들이 잇따라 퇴사하고 있다. 특히 삼성증권의 경우 세계적 증권사 출신의 투자은행(IB) 전문가 수 명이 연이어 사표를 제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각광받았던 그들은 왜 보따리를 싸야 했을까. 최근 다시 주목받는 외국계 출신 증권맨의 명암을 짚어봤다.
국내 증권사에 외국계 출신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홍콩 페레그린증권이 노태우 씨의 사돈기업인 동방유량과 합작해 설립한 동방페레그린증권이 원조다. 이 회사에는 당시 국내는 물론 외국계에서도 잘나가던 증권맨들이 대거 합류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뱅커스트러스트 출신이었던 이원기 현 이스트스프링자산운용 대표, JP모간 출신의 이남우 현 토러스투자증권 영업총괄 대표가 대표적이다.
이후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위상이 높아지고 외국계 출신에 대한 국내사들의 영입도 본격화된다. 특히 뱅커스트러스트 출신의 황영기 사장을 사령탑으로 했던 삼성증권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1998년 JP모간 출신의 이남우 센터장을 30대 중반에 임원으로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골드만삭스 출신의 임춘수 센터장(현 한국투자증권 부사장)까지, 주로 리서치센터에 외국계 출신을 포진시켰다. 현재도 삼성증권의 리서치센터는 크레디트스위스 출신의 황성준 부사장과 윤석 전무 라인이 지휘하고 있다. 황영기 사장은 우리금융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모건스탠리 출신의 박천웅 씨를 영입해 리서치와 해외영업을 맡기는 등 외국계 영입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초기에 영입된 외국계 출신들의 역할은 대부분 리서치와 해외영업이었다. 국내 투자자용으로 작성되던 리서치 자료를 외국인 입맛에 맞도록 바꾸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외국계 금융회사의 경영 스타일을 잘 알고, 외국인 투자자와의 인적 네트워크가 갖춰져 있다 보니 국내 증권사들이 외국계 투자자의 한국 투자 주문을 따오는 데는 이들이 적임자였던 셈이다. 덕분에 가장 먼저 외국계 영입에 나섰던 삼성증권은 해외주식영업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투자증권(옛 LG투자증권)과 대우증권 등 대형 증권사들도 외국계 영입을 통해 해외주식영업 부문에서 성과를 거두며 삼성과 함께 3강 체제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상은 어디까지나 ‘용병’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들을 고용한 증권사들이 대기업이나 은행 계열이다보니 특유의 조직문화 속에서 그 역할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이다.
외국계 출신으로 대형 증권사 임원을 역임한 인사는 “국내 대형 증권사에서 최고경영자(CEO) 한 번 돼 보겠다는 꿈을 가졌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며 “외부 출신이라는 낙인에다, 기존 기득권세력들의 견제, 그리고 CEO가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강요되는 능력 검증과 충성 입증 등을 견뎌내기란 정말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최근 삼성증권의 경우에도 CEO가 바뀔 때마다 전임 CEO가 영입했던 외국계 출신들도 함께 물갈이가 되고 있다. 황영기 사장에서 배호원 사장으로 바뀌면서 이남우 센터장이, 배호원 사장에서 박준현 사장으로 바뀌면서 임춘수 전무가 회사를 떠났고, 박준현 사장에서 김석 사장으로 바뀌면서 또 다시 외국계 출신 물갈이가 이뤄지고 있는 모습이다. 삼성증권의 경우 특히 박 전 사장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해외사업이 막대한 적자를 내며 좌초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됐다. 우리투자증권도 황영기 회장이 물러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박천웅 전무가 회사를 떠났다.
▲ 외환은행 딜러룸. 박은숙 기자 |
대표적인 예가 UBS와 뱅커스트러스트를 거쳐 우리투자증권과 삼성증권에서 일했던 한정철 전 전무다. 그는 주식과 채권 및 각종 파생상품 운용과 리스크 관리업무 전문가로 우리투자증권 시절 회사에 수천억 원의 수익을 안겨주고 본인도 수십억 원의 성과급을 챙기며 유명해졌다. 그러던 그가 2009년 삼성증권으로 옮겼지만 채 1년여 만에 회사를 떠나고 만다.
외국계를 영입했던 국내 대형 증권사의 한 임원은 “일하는 스타일부터가 다르다”면서 “외국에서 일하던 방식을 한국에서도 그대로 하려고 하니 잘 될 리가 없다. 조직 내 융화도 잘 못하더라. 불평만 많고, 언제든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있으면 옮기려고 하니, 애초에 기대했던 선진투자 노하우 접목은 공염불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꼬집었다. 물론 반론도 있다. 국내 대형사에 몸담았던 한 외국계 출신은 “외국계의 경우 글로벌 네트워크가 있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보니 일하기도 쉽다. 하지만 국내 회사에 와보니 글로벌 네트워크는커녕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지도 못했더라”면서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쥐어짜고, 술 마시는 식의 구태 영업을 하라고 하니 도저히 일할 환경이 안 됐다. 또 성과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일할 맛도 잘 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래도 국내 증권사에서 외국계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높은 편이다. 기존 조직에 대한 자극효과로도 외국계 영입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 해외 유학파 출신의 일부 오너나 최고경영자가 유학파 출신이 많은 외국계 출신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 토러스증권의 이남우 대표나, 한때 미래에셋에 몸담았던 박천웅 전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메리츠종금증권이 가장 좋은 예다.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은 남가주대학과 스위스IMD대학원 출신인데, 최희문 메리츠증권 사장은 뱅커스트러스트와 CSFB, 골드만삭스를 거쳤다. 글로벌트레이딩 담당 임원은 모건스탠리, 종금사업을 총괄은 뱅커스트러스트와 도이치뱅크, 골드만삭스를 거쳤고, 법인영업 담당은 메릴린치 출신이다.
한 대형사 CEO 출신 인사는 “리먼브라더스가 망한 후 아시아태평양 조직을 일본 노무라가 인수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동·서양의 차이, 글로벌과 로컬이라는 스케일의 차이가 큰 것”이라며 “글로벌 금융기관에서의 경험을 가진 인력들을 수용해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기업문화와 시스템, 무엇보다 경영스케일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필요하다. 바닷고기가 민물에서 살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