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장르의 벽이 무너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미술이다. 현대미술의 포용력은 용광로와도 같다. 주변 예술을 흡수해 미술로 만들어내고 있다.
섬유공예를 비롯한 목공예, 금속공예, 도자공예 등은 재료의 특성을 살려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으로 대접받는다. 디자인의 여러 요소도 현대미술의 새로운 언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고, 만화 역시 팝아트의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떠올라 이미 현대미술의 한 축으로 자라났다. 컴퓨터 그래픽을 비롯한 디지털 이미지, 사진과 영상도 현대미술의 신세대 언어로 통용되고 있다. 심지어 거리의 낙서나 생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일상 용품조차 정크아트라는 이름으로 현대미술이 됐다.
그런가 하면 전통 공예 기법인 옻칠, 나전, 혁필, 그리고 조선 말 키치적 요소의 그림인 민화까지도 현대미술의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동양적 미감의 현대화 작업으로 주목 받고 있다.
그런데 동양 예술의 기본 축을 이루어낸 서예는 현대미술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고 있다. 서예는 우리 전통미술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 말에는 서예의 필법을 응용한 새로운 감각의 산수화가 유행했고, 추사 김정희 같은 서예가는 독자적인 서체를 창출해 서예종주국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조형언어인 서예는 자연 형상이나 이치에서 뜻을 추출해 함축적 형태나 상징 기호를 보여주는 예술이다. 현대미술의 동력인 추상성과 직관적 우연성을 바탕을 깔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20세기 서양에서 시작된 추상미술에서도 주목 받았고, 추상표현주의 한 흐름으로 대접받았다. 이를 ‘서법적 추상’이라 불렀다. 서예의 필법과 직관성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예를 현대미술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조형서예’라는 이름으로 추진됐지만, 서예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추상회화의 한 기법으로 서예 필법을 차용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현실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자신의 서예 필법을 개척해온 작가가 심은 전정우다. 그는 ‘심은체’라는 자신의 독자적 서체를 창출해 서예계에서는 이미 대가 반열에 오른 작가다. 따라서 본 프로젝트에서 다루기에는 볼륨이 너무 큰 예술 세계를 확립했다.
그럼에도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서예의 본바탕을 중심으로 현대미술 언어의 새로운 지평에 도전하고 있는 정신을 응원하려 함이다. 이런 작가 정신이 한국미술응원프로젝트의 의도와 맞기 때문이다.
그는 정통 서예에 뿌리를 깊게 내린 필법을 응용해 현대 추상회화의 새로운 구성에 도전하는 외로운 길을 50년 가까이 걸어왔다. 추사 이후 자신의 서체를 확립한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예술은 작가의 독자적 창조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예는 동양의 정신을 대변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입니다. 그런데도 현대미술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서예가 현대미술 언어로 자리 잡는 일에 매달려 왔습니다. 그 노력의 결실로 제 서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